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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27㎝ 기생충’이 보여준 북한의 보건 현실 연구해야

이혜경 사단법인 새삶 대표·탈북 약사

이혜경 사단법인 새삶 대표·탈북 약사

지난달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탈출한 북한 병사가 수술 끝에 소생했다는 소식은 전 국민을 기쁘게 했다. 이와 함께 병사의 몸에서 최장 27㎝에 달하는 수십 마리의 기생충이 나와 수술 집도자인 이국종 교수를 곤혹하게 하였다는 뉴스도 전해졌다. 이에 그동안 기생충에 너무 무심했던 많은 사람이 구충제를 사 가는 바람에 동네 약국마다 기생충약이 동났다는 소식도 뒤따랐다.
 

기생충구충사업은 70~80년대
북한 보건의료사업 최대 현안
한국과 다른 북한 보건 정보
제대로 알아야 대응할 수 있어

이러한 기생충 소식은 북한에서 40년 내과의사 경력의 어머니를 뒀고, 12년 동안 병원 약제사의 경험이 있는 필자에게는 더욱 아프고 마음을 무겁게 했다. 실제로 북한에서 기생충 퇴치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연례적으로 시행되는 북한 보건의료사업의 주축(主軸)이기도 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회충구제 기간이면 어머니의 담당 구역을 함께 동행했다. 특히 평양의 18층짜리 여관(HOTEL)에서 벌인 회충구제사업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1970년대 어린 내 눈에는 왜 어머니가 새벽 일찍 나가 호텔 투숙객을 집합시켜 놓고 복약을 강요하고 감독하는지, 저 약은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 궁금증은 내가 보건일군(약사)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회충구제 기간이면 자기 담당 구역 관내의 인민반과 집단 숙박업체들(호텔, 여관, 대학교, 근로자 합숙소 등)에서 “회충증을 미리 막자!” “남새를 깨끗이 씻어 먹자!” 등의 사전 위생선전을 한다. 또 저녁식사는 죽(soup)으로 하고, 공복 상태에서 이튿날 새벽 일찍 기상하여 위생초소에 집합할 것을 당부하며 회충구제를 준비한다. 담당 보건의료인(1인 담당 3~4개 인민반: 150명 정도, 1개 이상의 합숙업소)은 새벽 5시 담당 구역에 도착해 누락된 세대와 개인을 체크하고 빠짐없이 복용토록 한다. 회충약은 소아(1~14세)는 정제로, 성인은 물약으로 공급했는데 아무런 감미제(甘味濟) 없는 ‘쑥우림약’은 강한 쓴맛 때문에 반드시 감독을 해야 했다. 이러한 회충구제사업은 매년 3~4월과 9~10월 2회에 걸쳐 시행되는 보건의료인들의 거사(巨事)이기도 했다.
 
시론 12/13

시론 12/13

90년대 들어 제약공장들의 물, 전기, 에너지 사정으로 회충약 제조가 어려워 회충약 부족으로 산토닌(Santonin) 쑥이 건초(藆草) 상태로 공급되었다. 보건일군들은 담당 구역 내에 나가 쑥을 우려서 공급해야 했다. 그 일의 어려움으로 인해 미공급 사태가 생겼고, 이후 3년여간 이런 건초 공급조차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98년 여름 느닷없는 유엔 약품 사찰단과 함께 유엔 약품이 도착했다.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공급된 약품 속 기생충약 메벤다졸(mebendazole)은 효과가 탁월했다. 이에 병원에서도 병원 성원(구성원)과 가족들에게만 식구 수에 따라 배급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최근 북한 내부의 소식통에 의하면 70~80년대의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보건일군들의 기생충 박멸 전투 의식은 거의 사라졌다는 전언이다. 통제적이고 강압적인 기생충사업이 자가화(自家化)되었으니 한 끼 식사거리보다 기생충약 구입과 복용에 더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에서 기생충 만연은 어제오늘, 그리고 특정 개인의 사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의 행군이 낳은 산물이다. 만성적이고 부실한 통제 상황은 북한 병사의 몸에서 기생충 수십 마리를 키운 것이다.
 
이미 북한은 94년부터 전 국민이 콜레라 등 온갖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아 거대한 전염병 서식지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이뿐만 아니라 간염과 결핵 유병률 또한 우리나라의 6.7배(WHO, 2010년 기준)다. 그 서식지를 경험한 북한 주민 중 3만여 탈북민이 국내에 입국했지만 아직까지 그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진행되거나 대책을 강구하는 데는 미온적이다.
 
일본은 북한 난민 유입에 대비해 ‘전염병 대책’을 마련했다고 한다(중앙일보 11월 13일자). 대량 탈북 20년이 되는 현 시점에서 그런 대책에 둔감한 우리에게 성찰과 반성을 요하는 대목이다. 탈북민 정착 업무를 전담하는 한 재단에서조차 북한 주민의 건강과 전염병 관련 연구물이 전무하다는 점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는 탈북민이나 북한 연구를 한다는 한국 연구자들이 90년대 북한의 대아사자(大餓死者) 문제는 짚으면서도 이런 아비규환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었던 전염병 현장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건강 안보가 결여된 군사 안보와 정치 안보는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생명 가치의 고귀함과 존중이라는 차원에서 북한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력과 모색 역시 우리의 소명이 아닐까 싶다.
 
이혜경 사단법인 새삶 대표·탈북 약사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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