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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시시각각] 보수의 자살 유서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공군은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전투기들의 손상 부위를 전수조사했다. 적의 공격에 취약한 부분을 보강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분석 결과 파손 부위는 날개와 꼬리에 집중돼 있었다. 이들 부분에 장갑을 보완하는 결정이 내려진 건 얼핏 당연해 보인다. 이때 한 연구원이 이의를 제기한다. “적 탄환에 손상될 확률은 전투기의 어느 부위나 똑같다. 그런데 날개와 꼬리 부분이 손상된 전투기가 많은 건 그들이 그나마 귀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종석이나 엔진 부위에 탄환을 맞은 전투기들은 치명상을 입고 추락한 것이다.”
 

여야 할 것 없는 생존자 편향 오류
국민들만 죽어나니 억울할 뿐이다

철판을 덧대야 할 곳은 조종석과 엔진 부위였던 것이다. 이 연구원의 탁견이 없었더라면 쓸데없이 중량만 늘려 오히려 전투기를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했을 터다. 이처럼 살아남은 사례만 분석해 잘못된 결과를 얻는 오류를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이라고 한다. 실력이 아니라 ‘우연히’ 또는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이라면 오류는 더욱 커진다. 이러한 생존자 편향의 오류가 때 아니게 이 땅의 정치지형을 흐리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똑같다. 그래서 더 심각하고 절망적이다.
 
이 땅의 진보는 운 좋게 굴러들어온 정권을 자기들이 잘해서 잡은 줄 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는 아랑곳없다. 스스로 취약한 부분을 채우는 대신 엉뚱한 곳에 철판을 덧댄다. 비정규직·최저임금·탈원전 같은 곳 말이다. 단단하게 만들면 피해가 적을 걸 누가 모르랴. 하지만 그래서 더 빨리 더 높게 날 수 없게 된다면 전투기의 생존 가능성은 더 떨어질 뿐이다. 벌써 아파트경비·빌딩청소 같은 일자리 5만 개가 사라졌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그사이 정작 보완해야 할 노동개혁은 해마다 진화하는 현대차의 신개념 파업처럼 더욱 커다란 구멍을 드러내고 있다.
 
1983년 영국 노동당 정책의 데자뷔 같다. 보수당의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과 보조금 삭감, 민영화 등 개혁을 추진할 때였다. 일시적으로 실업률이 폭등했고, 정부 지지도가 18%까지 곤두박질쳤다. 이에 고무된 노동당은 정권 탈환을 위해 더욱 크게 좌회전했다. 공기업 재국유화, 노조 특권 부활, 일방적 핵무기 포기, 유럽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탈퇴 등을 공약했다. 당 내부에서조차 포퓰리즘이란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대변인이던 제럴드 카우프먼 의원은 공약을 두고 “역사상 가장 긴 자살 유서”라고 개탄하기까지 했다. 결과는 다 아는 대로 노동당의 참패였다. 역사상 가장 적은 총선 득표율과 최하 의석 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땅에서 그런 결과가 나올 것 같진 않다. 영국 노동당에는 없던, 최악의 취약 부분을 갖고 있어도 그렇다. 외국방송 앵커에게 “위험 앞에서 머리만 숨기는 타조”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외교장관이 아무 말도 못하는 대북정책 말이다. 상대가 더욱 순도 높은 생존자 편향 오류에 빠져 있는 까닭이다. 이 땅의 보수(제1야당)는 가만히 있으면 현 정권이 제 발에 걸려 넘어져 권력이 다시 굴러들어올 줄 안다. 아직도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말문을 잃은 다수의 보수 유권자들 대신, 눈앞의 이익에 목을 맨 목소리만 듣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을 견제하는 데는 무기력하고, 요지부동 10몇%만을 위해 철판을 덧대 철옹성을 쌓아올린다.
 
차라리 이것이 한국판 ‘역사상 가장 긴 자살 유서’라 해도 무리 없겠다. 이 땅의 대다수 국민인 중도보수 유권자들은 안중에도 없으니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사라진대도 관심 둘 것 없으나, 그 와중에 백성들만 죽어나게 생겼으니 억울해서 하는 소리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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