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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연구자들, "외교 정책 바뀌면 지원 끊길가 노심초사”

“생존자의 증언에 무게를 더하고 싶었습니다.”
 

박정애 연구팀장 인터뷰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팀
최초로 ‘트럭섬’ 위안부 명단 공개

고 이복순 할머니가 트럭섬의 위안부였다는 사료를 처음으로 발굴하는 성과를 낸 연구팀의 박정애(43·사진) 서울대 인권센터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팀 연구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 교수이기도 한 그는 “90년대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증거를 대보라'는 식으로 나왔다. 사료의 중요성을 그때 인식했다”고 말했다.
박정애 서울대 인권센터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팀 연구팀장은 11일 전화 인터뷰에서 "저희(위안부 연구자들)에게는 '내일'이 없다"고 말했다. 외교관계에 따라 연구 환경이 흔들린다는 의미다. 홍지유 기자

박정애 서울대 인권센터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팀 연구팀장은 11일 전화 인터뷰에서 "저희(위안부 연구자들)에게는 '내일'이 없다"고 말했다. 외교관계에 따라 연구 환경이 흔들린다는 의미다. 홍지유 기자

박 팀장은 위안부 연구의 현실적인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는 “저희는 ‘내일’이 없다. 정부 외교 방향이 달라지면 언제 연구 지원이 끊길지 모른다”고 했다. 이어 “현재 학계에서 이뤄지는 위안부 관련 연구는 개별 연구자들의 임시 프로젝트 모임에 가깝다”며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 팀장은 한국 근대여성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동국대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5년부터 정진성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이끄는 위안부 연구팀에 합류했다. 다음은 박 팀장과의 일문일답.
 
트럭섬 위안부 사료는 어떤 의미가 있나
 
=90년대는 생존 할머니들의 존재가 증거였다.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돌아가시자 일본이 문제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생존자 객관성을 의심하며 증거를 대보라는 식이었다. 사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 이 시기다. 자료를 통해 객관성을 드러내고, 생존자들의 증언에 무게를 더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최초의 트럭섬 자료’가 아닌 자료에서 길어올린 여성 한 명 한 명의 역사를 알릴 수 있길 바란다. 
 
사료 연구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이복순 할머니는 생전에 증언집을 남기지 않았다. 93년 12월 정부에 위안부 피해를 신고했을 때 남긴 신고서엔 1943년 트럭섬에 끌려갔다는 내용만이 담겨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내용조차 국가에서 개인정보로 관리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생전에 대구에서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이인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희움’ 관장으로부터 할머니의 생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본 문서엔 창씨개명된 이름만이 나와 동일인물인지 확인하기 위해선 한국의 재적등본을 찾아야했다. 어렵게 등본을 찾았는데 할머니의 부친이 개명을 해 다시 한 번 혼선이 생겼다. 이런 자료를 일일이 뒤지는 데 경북 안동, 대구, 서울시 관계자들의 도움을 두루 받았다.
 
위안부 연구자들에게 '내일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뭔가
 
=연구가 외교관계에 휘둘리게 되는 것이 문제다. 위안부 관련 연구들은 1년 단위의 연구용역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연구가 진행되는 와중에 정부 지원이 끊겨 팀이 공중분해되는 경우도 생긴다.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연구성과를 쌓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협정이 타결되자 여성가족부 연구비 지원이 중단됐다. 사전 조사를 다 하고 미국행 비행기 예약도 끝난 상황에서 프로젝트가 엎어진 거다. 여가부에서 받은 설명은 ‘연구계획서가 부실해서’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통보가 전부였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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