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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외환위기 극복의 노사정 대타협 DNA 찾습니다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외환위기로 대한민국이 꽁꽁 언 1998년 1월 12일 밤. 경기도 일산의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집에 노조 간부가 비장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이었다. 전날 김 당선인은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금융구조조정에 합의했다. 박 위원장과 독대를 허락한 당선인은 남미 사례를 들었다. 모라토리엄(국가부도) 같은 더 큰 위기만은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1998 대타협은 노동계 배려와 리셋 마인드가 빚은 작품
2017 노사정 제 살길만 도모 … “고용 생태계 교란 우려”

그런 김 당선인에게 박 위원장이 당찬 제안을 했다. “금융만 아니라 다른 것까지 포괄해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노사정 대화기구에서 다루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경제 운영의 틀을 리셋하자는 얘기다. 노동계의 제안이라기엔 너무 파격이었다. 하지만 당선인의 반응은 차가웠다. 금융구조조정을 막기 위한 고육책 정도로 여겼다. 김 당선인은 “노개위(97년 운영된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 6개월 넘게 대화해도 결론을 못 내지 않았습니까”라고 맞받았다. 노사정 대화로 풀 상황도 아니고, 믿지 못하겠다는 메시지였다. 정부 주도의 강력한 개혁을 천명한 셈이다.
 
박 위원장은 “2개월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 안에 결론을 내지 않으면 당선자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했다. 합의 시한까지 못 박는 저돌성에 당선인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사흘 뒤(15일) 노사정위원회가 설립됐다.
 
그리고 1개월이 채 안 된 2월 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나왔다.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 도출한 대타협이었다. 무려 90개 항이었다. ▶정리해고 도입 ▶핵심주력 위주로 기업 구조조정 단행 ▶임금체계 개편 ▶부동산 보유세 강화와 거래세 완화 ▶규제 완화와 기업부담 경감조치 마련 ▶정부조직 통폐합으로 경영 효율 제고 등이다. 국가개혁 매뉴얼인 셈이다. 네덜란드 경제위기 극복의 토대를 제공했던 바세나르 협약이나 독일의 하르츠 개혁 못지않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2월 25일) 뒤 이 협약의 이행에 착수했고, 대한민국호는 재기의 기지개를 켰다.
 
박 위원장은 이후 미국상공회의소 등을 찾아다니며 노동외교를 폈다. “안심하고 경영할 수 있게 돕고, 이익을 보장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해외 한국 공장에서 노사문제가 터지면 해당 국가를 직접 찾아가 설득하고 해결했다. 국회의원과 노사발전재단 이사장 등을 거치면서도 그의 생각은 크게 달라진 적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런 박 전 위원장을 “영원한 위원장”이라고 했다. 노동계가 가야 할 길을 보여준 까닭 아닐까.
 
외환위기 20년 만에 당시를 되짚다 그에게 연락했다. 박 전 위원장은 마주 앉자마자 “내년에는 삼각파도가 몰아친다. 기업이 힘들 거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일자리가 위험해진다. 걱정이다”고 했다. 그가 말한 삼각파도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 문제다. 그는 “하나씩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히 하고, 경영계 입장도 들어야 하는데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아예 만나지도 않으니…”라고도 했다. 고용생태계의 교란을 우려하고 있었다.
 
박 전 위원장은 노동 측면에서 내년을 전망했지만 다른 것도 녹록하지 않다. 북핵 문제는 심각해지고, 원화가치가 상승하고 있다. 여기에 유가까지 고공행진을 할 전망이다. 유가가 오르면 물가가 상승하고, 구매력이 약화한다. 기업매출은 감소하고, 투자 위축도 불가피하다.
 
그런데도 정부에선 낙관만 판친다. 경제성장률이 올해와 비슷하고,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도래한다는 식이다. 이러다 보니 위기 요소를 관리할 만한 정책은 안 보인다. 노조는 이익 챙기기에 몰두 중이다. 경영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경영계는 움츠린 채 눈치만 살핀다. 노사정이 모두 따로 노는 셈이다.
 
박 전 위원장은 두 시간의 만남을 뒤로하고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내년엔 언론이 많이 바쁘겠어. 금 모으기 할 때 그 정신을 노사정이 가지면 좋을텐데….”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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