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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공화당 4인방과 일전 불사했던 오치성 전 내무부장관

오치성 전 내무부 장관.[중앙포토]

오치성 전 내무부 장관.[중앙포토]

 
박정희 시대 ‘친위 개혁자’로 평가돼 온 오치성 전 내무부 장관이 9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91세.
 
고인은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8기다. 동기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함께 ‘5ㆍ16’을 주도한 8인 핵심 멤버 중 하나였다. 이후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으며 공화당 소속으로 6대 전국구 의원, 7·8·10대 지역구(경기 포천ㆍ가평ㆍ연천) 의원 등 4선 의원을 지냈다. 1969년 공화당 사무총장, 70년 정무담당 무임소장관에 올랐다.
 
고인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71년 ‘10ㆍ2 항명 파동’이다. 71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을 총리로, 고인을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69년 3선 개헌을 성공시킨 뒤 지나치게 권력화된 공화당 4인방(김성곤ㆍ백남억ㆍ길재호ㆍ김진만)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  
 
1971년 10월 23일 김대중 의원(오른쪽)이 국회 본회의에서 ‘10·2 항명 파동’ 대정부 질문을 하고있다. 김종필 국무총리(왼쪽)와 신직수 법무장관(뒷줄 오른쪽) 등이 출석했다. 10·2 항명 파동은 공화당 의원들이 주도해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건의안을 가결한 사건이다. [사진제공=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71년 10월 23일 김대중 의원(오른쪽)이 국회 본회의에서 ‘10·2 항명 파동’ 대정부 질문을 하고있다. 김종필 국무총리(왼쪽)와 신직수 법무장관(뒷줄 오른쪽) 등이 출석했다. 10·2 항명 파동은 공화당 의원들이 주도해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건의안을 가결한 사건이다. [사진제공=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고인은 장관 임명 직후 대폭적인 경찰 물갈이에 나섰다. 김 전 총리의 회고는 이렇다. “ 각 도의 경찰국장들이 상당액의 활동비를 김성곤(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부터 매달 받고 있었다. 경찰국장들이 내무장관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무슨 일이 생기면 김성곤에게 먼저 보고했다. 오치성은 나를 찾아와서는 ‘경찰이 내무장관이 아닌 김성곤 관할하에 있다. 김성곤이 뭔데 세상을 어질러 놓느냐’고 야단을 했다. ‘단도직입으로 덤벼야 한다’며 별렀다. 결국 4인방의 손발 노릇을 했던 경찰을 대거 교체했다.”『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 』중.
 
실세였던 4인방으로선 그냥 당할 수 없었다. 그해 9월 30일 야당인 신민당은 오치성 내무장관,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신직수 법무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국회의원 204명 중 공화당이 113명이었다. 집권당이 마음만 먹으면 당연히 부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김성곤 등 4인방은 눈엣가시 같은 오치성을 쫓아내기로 뜻을 모았다.  
 
결국 10월 2일 찬반 투표가 진행돼 김학렬ㆍ신직수 장관 해임안은 부결됐지만, 고인의 해임안은 가결됐다(찬성 107, 반대 90, 무효 6표). 공화당에서 20표 넘은 찬성이 나온 꼴이었다. ‘10ㆍ2 항명 파동’이었다. 고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은 10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해임안이 통과된 당일 고인을 만났다. 눈물을 흘리면서 억울하다고 하셨다. (고인이) 단호하게 대응하다 4인방과 마찰을 빚어 벌어진 일”이라고 전했다.
 
항명 파동에 박정희 대통령은 격노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주동자를 색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다.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결국 박정희 친정체제를 더 강화했다.  
1979년 3월 15일 제10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의도 의사당에 등원하는 김종필 ·박종규·오치성 의원(왼쪽부터). [사진제공=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79년 3월 15일 제10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의도 의사당에 등원하는 김종필 ·박종규·오치성 의원(왼쪽부터). [사진제공=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고인은 장관에서 내려온 이후 78년 의원에 다시 당선됐으나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엔 사실상 정치권과 발을 끊었다. 주변에서 여러 차례 러브콜이 있었지만 “부귀영화 누리고자 정치했던 거 아니다. 내 역할은 이미 끝났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오히려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나는 등 연구에 정진했다. 이건개 전 고검장은 “고인은 고지식했다. 미국 유학 시절엔 연구실에서 토론만 했다. 특히 80년대 미국 정치학계에 팽배한 반(反) 박정희 기류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고 전했다.
 
고인은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69년 경기 가평에 홍수가 났을 때는 현장을 일일이 둘러본 뒤 비에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당정회의에 참석해 “탁상공론만 하지 마시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한동 전 총리는 “특히 낙후된 경기 북부지역을 되살리는 데 공이 컸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오치성 전 내무부 장관.[중앙포토]

오치성 전 내무부 장관.[중앙포토]

유족으로는 부인 길선오 씨와 장남 경서, 차남 경재, 3남 경훈 씨와 장녀 혜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12일 오전 8시다. 02-2258-5940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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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