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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허브’ 료마, 앙숙 화해시켜 메이지유신 길 열다

[세상을 바꾼 전략] 일본 근대화 원동력 ‘삿초 동맹’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 전쟁의 작전지도. 이때 료마는 조슈를 지원하여 막부 세력과 싸웠고, 조슈가 실질적으로 승리했다. [위키미디어]

사카모토 료마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 전쟁의 작전지도. 이때 료마는 조슈를 지원하여 막부 세력과 싸웠고, 조슈가 실질적으로 승리했다. [위키미디어]

지금으로부터 꼭 150년 전인 1867년 12월 10일(음력 11월 15일)은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사적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날이다. 32세를 맞는 생일(음력 기준)이기도 한 날에 자객의 습격으로 굵지만 짧은 생애를 마친 사카모토 료마(본명 나오나리) 이야기다.
 
그의 일대기는 오늘날 소설·드라마·영화·연극·뮤지컬·만화 등으로 일본 내에 널리 알려져 있다. 료마는 일본 체제가 부국강병의 길로 들어서게 했고, 이는 훗날 한반도의 식민 지배, 분단, 전쟁, 냉전 등을 포함해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끼쳤다. 짧은 활동 기간에 큰 변화를 이룬 것은 그만큼 료마의 활동이 전략적이었다는 의미다.
 
도사번(土佐藩, 오늘날 고치현 지역) 출신 료마의 전략적 행동은 사쓰마번(薩摩藩, 오늘날 가고시마현 지역)과 조슈번(長州藩, 오늘날 야마구치현 지역) 간의 이른바 삿초(薩長) 동맹의 주선에서 두드러졌다. 앙숙 간에 결성된 삿초 동맹으로 비로소 메이지 유신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또 육군과 해군을 각각 축으로 한 조슈 파벌과 사쓰마 파벌이 한동안 일본 정치를 지배하기도 했다.
 
 
“막번 체제 폐지” 선각자 의견 접해
메이지 유신이 태동한 장소임을 나타내는 비석. 1968년 메이지 유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슈 출신 사토 에이사쿠(아베 신조 총리의 작은 외조부) 일본 총리의 글씨를 새겨 쇼인 신사 내에 세웠다. [사진 김재한]

메이지 유신이 태동한 장소임을 나타내는 비석. 1968년 메이지 유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슈 출신 사토 에이사쿠(아베 신조 총리의 작은 외조부) 일본 총리의 글씨를 새겨 쇼인 신사 내에 세웠다. [사진 김재한]

조슈와 사쓰마는 지정학적으로 서로 경쟁자일 수밖에 없었다. 1860년대 전반 조슈의 주류는 ‘왕을 높이고 외세를 배척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이는 당시 지배 세력인 막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비해 비슷한 시기 사쓰마는 막부의 개국 노선을 지지했다. 이런 차이는 일련의 사건으로 철천지원수 관계로 전개됐다.
 
먼저, 이른바 ‘분큐의 정변’ 또는 ‘8월 18일의 정변’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1863년(분큐 3년) 고메이 덴노(일왕)가 도쿠가와 막부에 외세 배격을 명하자 막부는 그렇게 하겠다고 밝혔으나, 정작 조슈만이 계획된 날에 미국 상선을 포격했다. 이후 조슈는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교토 조정 역시 위기에 직면하여 존왕양이파 귀족들을 실각시키고 대신에 ‘조정(公)과 막부(武) 간의 합체’를 강조하는 공무합체(公武合體)파 귀족들을 등용했다. 8월 18일(이하 음력) 조정은 조슈번의 경쟁자인 사쓰마번과 아이즈번의 병사들에게 황궁 경호를 맡기고 조슈 번사들을 교토에서 쫓아냈다. 이 사건으로 일부 조슈 번사들이 ‘사쓰마는 도적이고 아이즈는 간사하다’는 뜻의 살적회간(薩賊會奸) 네 글자를 신에 쓰고 다닐 정도로 사쓰마에 대한 조슈의 원한은 컸다.
 
다음, ‘겐지의 변’ 또는 ‘금문(禁門)의 변’ 또는 ‘하마구리고몬(蛤御門)의 변’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1864년(겐지 원년) 조슈 세력은 교토수호직을 맡고 있던 아이즈 세력을 배제하려 거병했다. 조슈 세력은 교토 황궁에 진입했으나 칸몬(乾門)을 지키던 사쓰마 병력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패배하고 말았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조슈와 사쓰마는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이 시절 료마는 당시 중형으로 처벌되던 탈(脫)번을 감수하면서 일본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1862년에는 조슈의 하기 지역을 방문하여 막번(막부와 여러 번) 체제를 폐지하고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는 조슈 선각자들의 의견을 접했다. 요시다 쇼인이 내세운 일군만민(一君萬民) 즉 ‘오로지 덴노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동등하다’는 주장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같은 해 료마는 막부의 개국파 관료인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었는데 외세 배격은 불가함을 깨달았다. 즉 막번 체제 대신에 ‘존왕’을 추진하되, ‘양이’ 대신에 개화로 가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1864년 가이슈가 외국 세력과 조슈 간 충돌의 중재자로 나가사키에 파견되었을 때 료마도 수행했다. 8월 료마는 가이슈의 사신으로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면담했다. 11월 가이슈가 파직당하자 료마는 사쓰마로 망명했고, 사쓰마의 지원을 받아 일본 최초의 상사(주식회사)로 일컫는 가메야마 조합을 나가사키에 설립했다. 료마는 반(反)막부 세력이 단결해야 왕정복고가 가능하다는 소신을 갖고, 사쓰마 지도자들에게 조슈와의 숙적 관계를 청산하라고 권고했다.
 
1865년 5월 료마는 나가사키에서 조슈의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로 추후 개명)를 면담했다. 6월 료마는 사쓰마의 이름으로 조슈에게 대신 무기를 구매해 주는 방식에 대해 사이고의 동의를 얻었다. 료마는 막부의 조치로 외국산 무기를 구할 수 없었던 조슈가 사쓰마 명의로 군함을 포함한 여러 무기를 구입할 수 있게 주선했다. 대신 사쓰마는 조슈 지역에서 군량미를 조달할 수 있었다.
 
1866년 1월 사쓰마와 조슈의 만남은 서먹했다. 료마가 교토 고마쓰의 저택 모임에 합류한 후에야 협상은 진척되어 사쓰마의 사이고 그리고 조슈의 고고로가 6개 조항에 합의했다. 2월 5일 고고로의 요청에 따라 료마는 고고로의 편지 뒷면에 합의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 합의에 따라 사쓰마는 1866년 6월에 시작된 제2차 조슈 정벌에 불참했고, 료마는 조슈 측에 직접 참전했다. 조슈는 사쓰마의 도움으로 ‘조정의 적’에서 벗어났다. 1867년 11월 사쓰마 번주가 상경하여 조슈 세자와 출병 협정을 맺어 삿초 동맹을 공식화했다. 12월 교토를 장악한 삿초 동맹의 권고에 따라 메이지 왕정복고가 선포됐다. 료마는 완전한 왕정복고를 보지 못한 채 교토에서 숨을 거뒀다.
 
료마 암살은 막부 자객이 행한 것으로 대체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의견도 많다. 료마가 막부 인재를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막부의 완전 타도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를 껄끄럽게 여긴 사쓰마번이 암살 배후라는 설도 있고, 선박 충돌 사고로 료마의 무역상사에게 배상금을 물어 줘야 했던 기슈번이라는 설도 있으며, 도사번 내부에서 료마를 견제하여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 그만큼 료마는 누구와도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료마가 앙숙 간의 동맹을 타결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료마는 국내외 여러 세력과 밀접한 네트워크를 갖추어 허브와 같은 연결고리였다. 특히 글로버 등 열강의 무역상과의 네트워크는 조슈의 무기 조달에 도움이 되었고, 이는 다시 사쓰마의 군량미 조달을 가능하게 했다. 료마는 사쓰마를 비롯한 몇몇 당사자의 에이전트라는 주장들이 제기된 바 있는데, 그만큼 료마가 여러 당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의미다.
 
 
삿초뿐 아니라 다른 번과의 통합도 추진
1866년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의 요청에 따라 료마가 이서한 삿초 동맹 합의서. [일본 궁내청 소장본]

1866년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의 요청에 따라 료마가 이서한 삿초 동맹 합의서. [일본 궁내청 소장본]

둘째, 료마는 연결고리에 그치지 않고 신뢰를 받았다. 삿초 동맹의 당사자가 합의 후 아무런 공식 직함이 없던 료마의 이서를 필요로 했던 것은 그만큼 료마가 모두의 신뢰를 받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신뢰는 배척 대신에 주로 통합이라는 가치 추구에서 나왔다.
 
셋째, 료마는 삿초뿐 아니라 여러 번까지 아우르는 통합을 추구했다. 사실 사쓰마와 조슈 간에는 다른 점이 많았다. 막부에 대한 태도만 해도 그렇다. 막부를 철저하게 타도하려던 조슈와 달리, 사쓰마의 타도 대상은 막부 제도라기보다 이른바 이치카이소(一会桑) 정권이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군사력이 별로 없던 히토츠바시(一橋) 도쿠가와 당주보다는 아이즈(会津) 번주와 구와나(桑名) 번주였다. 반면에 료마는 막부와 여러 번의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료마는 인물 척결보다 체제 변혁을 지향했다. 막부가 반(反)막부의 존왕양이파보다 개방을 지향했지만 위기 극복의 동력을 이미 상실했고 따라서 체제 변혁이 필요하다고 료마는 생각했다.
 
료마가 작성했다는 신정부강령팔책의 마지막 문단에 등장하는 “OOO 스스로 맹주로 나서서 이 안을 조정에 올려 천하 만민에게 공포하며”라는 대목의 OOO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비롯한 여러 인물이 거론될 정도로, 료마는 여러 당사자가 함께 할 여지가 있는 전략적 안을 마련했다.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일컫는 료마 부부의 방문을 기념하는 가고시마 시내의 동상. 삿초 동맹 합의 며칠 후 발생한 테러에서 다친 료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추천으로 가고시마 일대의 온천에서 휴양했다. [사진 김재한]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일컫는 료마 부부의 방문을 기념하는 가고시마 시내의 동상. 삿초 동맹 합의 며칠 후 발생한 테러에서 다친 료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추천으로 가고시마 일대의 온천에서 휴양했다. [사진 김재한]

넷째, 료마는 자신의 세속적 이해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공공적 목적에서 삿초 동맹을 추진하고 신정부강령팔책을 기안했다. 료마는 주고받기식 사적 거래보다, 정책에 의한 공공재적 생산을 추진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연대는 제3자에게 나쁠 때가 많다. 배제된 측의 시각에선 연대는 담합이나 악의 축에 불과하고 악평 받기 마련이다. 만일 특정 연대가 체제 경쟁력을 높여 연대 밖의 체제 구성원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연대에 끼지 못했지만 그 과실을 공유하는 연대 밖의 체제 구성원도 호평을 보낸다. 일본을 부국강병의 길로 들어서게 한 삿초 동맹은 그런 점에서 일본 내에서 호평을 받는 것이다. 물론 식민 지배를 받은 한국의 입장에서야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연대 이론에서는 자신의 몫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급적 작은 연대 즉 최소승리연합을 추진한다고 본다. 이에 비해 위기 상황에서의 료마식 연대는 사심보다 공공성으로 동기를 부여하여, 분열적인 작은 연대보다 통합적인 큰 연대를 궁극적으로 모색하고, 인물 교체보다 체제 변혁에 목표를 두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권에서 연대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앙숙끼리의 연대는 늘 어렵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협력도 마찬가지다. 정계 개편이든 국제질서 개편이든, 숙적 관계를 뛰어넘어 시스템을 바꿀 통합적 연대는 사심 없고 신뢰받는 주선자가 나설 때 더욱 가능하다. 21세기 한반도에서 료마를 찾을 수 있을까?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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