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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일의 시시각각] 줄리아를 품지 못하는 나라

홍승일 중앙디자인웍스 대표

홍승일 중앙디자인웍스 대표

1945년 광복 이후 몰락 조선 왕족의 수난사 중 가장 극적인 인생유전은 꽤 알려진 대로 이석(76·본명 이해석)이다. 중장년 이후 세대라면 국민가요처럼 흥얼거리곤 하는 ‘비둘기 집’의 바로 그 가수다. 1969년 취입한 이 노래로 반짝인기를 얻었을 때를 제외하면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벌이는 일마다 실패, 극심한 생활고의 도피처 삼아 베트남전에 자원입대하지만 부상을 입고 귀국한다. 미국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막노동 전전, 가정불화와 거듭된 자살 기도···.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아들인 ‘마지막 황손’의 이 참담한 실상이 10여 년 전 언론보도로 알려지자 다행히 전주 이씨 본향이 발 벗고 나섰다. 전주시의 배려로 전주한옥마을 내 승광재(承光齋)라는 집에 기거하며 문화해설·역사강연 같은 일을 하고 있다.
 
100세를 맞은 의친왕의 딸 이해원 옹주 역시 경기도 하남의 무허가 판자촌 단칸방에서 정부 생활보조금을 받으며 곤궁하게 살다가 최근 그 집이 재개발에 들어갔다. 조선 개국 600여 년 통틀어 최장수일 이 옹주는 칠순의 아들과 임대주택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 간다고 한다.
 
94세를 일기로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처연히 별세한 ‘조선의 마지막 세자빈’ 줄리아 리. 영친왕의 푸른 눈 며느리인 그가 1995년 한국을 등진 것도 주변과 정부가 따뜻하게 보듬지 못한 탓이었다. 칠순을 넘겨 예전 같지 않은 건강으론 한국의 낙후된 노인복지시스템이 불편했다. 2005년 전 남편 이구의 빈소를 찾았을 때도 장례위원회 측은 “자리가 없다”고 홀대했다. 1982년 이구와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은 직후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사랑한다. 여생을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한 그였다.
 
조선 왕족은 광복 이후 70년 넘게 남한에선 민주공화국의 이름으로, 북한에선 반봉건 이념에 의해 ‘적폐’ 대상이었다. 취약한 대한민국 신생정부는 ‘고종의 후예가 정권의 경쟁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에, 일본 강점기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영친왕 등 왕족의 귀국을 막았다. 왕족의 재산 환수, 가택 추방도 횡행했다. 구한말 역사 하면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구부(舅婦) 암투 같은 왕조의 무능·분열이 유독 부각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일제 국권 침탈의 제물이 된 원죄를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은 면하기 힘들다 해도 생활력이 부족한 왕족이 남북 분단, 6·25 전쟁, 박정희 개발연대의 급속한 사회변화 소용돌이 속에 그냥 내동댕이쳐진 것은 가혹했다. 이방자·덕혜옹주·줄리아 같은 조선 왕가 여인들의 거처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 배려한 것이 고작이었다.
 
27대 왕, 519년의 조선왕조실록을 자랑스러운 우리 세계문화유산으로 내세우면서 왕족과 후손에 대한 해방공간의 홀대는 균형을 잃은 처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으로 이웃 나라는 물론 일본 국민에게도 크나큰 고통을 안긴 일 국왕과 왕실은 꾸준히 자국 내에서 존중받는 것과 대조된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전임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깡그리 무시하곤 하는 조직문화, 그래서 암묵지가 형성되기 어려운 직장 토양, YS 문민정부 이후 20년간 정권교체기마다 거듭되는 정치 보복과 적폐 청산···. ‘과거=청산 대상’이라는 DNA가 뿌리박힌 것인가.
 
죽어야 그림값이 오르는 화가의 신세처럼 조선 왕족은 철저히 잊혔다가 세상을 뜨면 관심을 받는다. 덕혜옹주가 그랬고, 영친왕과 이방자 부처, 이구 황세손이 그랬다. 반짝 관심 끌다가 금세 잊히는 것도 똑같다. 줄리아도 그렇게 될까. 말년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지만, 그의 한 줌 유해는 태평양에 뿌려졌다.
 
홍승일 중앙디자인웍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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