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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호랑이가 금연을 강요받던 시절, 100년 전 동북아 격동기의 우화

문학이 있는 주말


유리

유리

유리
박범신 지음
은행나무
 
박범신(71)씨만큼 사연 많은 작가도 드물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느닷없는 절필 선언…. 40년이 넘는 그의 작가 이력에는 자살 기도 같은 끔찍한 대목도 있다. 기득권이라며 대학교수직을 반납하고 삭발을 하기도 했다. 최고의 작품을 쓰기 위해서라는 게 당시의 변이었다. 그는 한 군데 정착하길 싫어하는 듯했고, 위기가 찾아오면 작품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소개하는 그의 새 장편도 이를테면 위기 돌파용이다. 그는 지난해 가을 문단 성추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성 추문에 휘말린 여파로 공식 활동을 못 하게 된 답답한 국면 타개용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래저래 관심 가는 작품인데, 소설은 첫 장면부터 허를 찌른다. 정체불명의 할아버지 유리라는 인물과 외손녀 사이의 대화가 사진 찍은 듯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초현실적으로 발랄해서다. 더구나 유리가 사는 나라는 수로국(水路國)이라는 설정이다. 수로국은 화인국(火人國)의 지배를 받고 있고, 북쪽으로 “몇 년을 걸어도 땅이 끝나지 않는” 대지국(大地國)을 접하고 있다. “호랑이가 금연을 강요받던 시절” 벌어지는 이야기다. 대략 100년 전(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이후의 시절이니 그리 먼 과거는 아니다) 한·중·일 격동기에 대한 우화다.
 
유리(流離)는 작가의 분신인 듯, 뿌리 없는 인간 존재의 운명을 짊어진 대속자인 듯, 자신의 한자 이름처럼 끊임없는 유랑을 거듭한다. 속필(速筆)에 일가견이 있는 박씨의 손끝에서 풀려나오는 유리의 여정은 일일이 복기하기가 힘들 정도로 어지럽고 방대하다. 인륜을 저버리고 어머니와 통정한 큰아버지를 처단하고 평생 대지국(멀리 둔황까지 간다)과 풍류국(대만)을 떠돌다 고국에 돌아와 자신의 수로국 국적, 큰아버지를 처단하는 순간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 까맣게 잊어버린 자신의 원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이 소설의 큰 뼈대다.
 
박씨는 강박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동북아 100년의 역사적 현장마다 유리를 입회시킨다. 이념과 폭력의 세기를 목격한 유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테두리나 지배체제도 갖추지 않은 자연스러운 공동체다. 그렇지 않은 정치 체제는 존재의 고유성, 개인의 꿈과 눈물을 억압하는 구속일 뿐이다. 이런 모색이 빠르게 읽히는 소설 곳곳에 배치돼 있다. 메시지와 가독성, 두 마리 토끼를 쫓은 소설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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