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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모으기 351만 동참, 지금은 보기 힘든 공동체 의식의 힘”

1997년 12월 10일 새마을부녀회연합회가 금 모으기의 시초가 된 애국 가락지 모으기를 했다. [중앙포토]

1997년 12월 10일 새마을부녀회연합회가 금 모으기의 시초가 된 애국 가락지 모으기를 했다. [중앙포토]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이해할 수가 없죠? 지금 찾아보기 힘든 공동체의식이 그땐 우리 사회에 분명 있었습니다.”
 
열다섯 돈 금목걸이, 쌍가락지 결혼반지, 장롱 속 황금열쇠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한 푼 보상도 없이 순수 기부 형태로 내놓은 가계의 귀중품들이다. 정행길(76) 전 새마을부녀회연합회장은 20년 전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는 외환위기의 칼바람이 몰아치던 1997년 12월 1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 특별행사를 기획 추진했다. 이듬해 1월 범국민 금 모으기로 발전한 운동의 시초가 된 행사다. 지난달 21일 경남 창원시 새마을회관에서 만난 정 전 회장은 금 모으기 아이디어가 떠오른 그해 11월 21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서울 집에서 TV를 보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국제통화기금(IMF)이 도대체 뭐지?” 그는 “다음 날 아침 신문을 보고 집에 있는 금반지를 모으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회상했다.
 
처음부터 거창한 의도로 추진한 건 아니었다. 애국 가락지 모으기는 12월 3일부터 일주일간 전국 새마을부녀회 조직을 통해 진행됐다.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이 일었다. 350여 명이 참여해 1억3095만원어치를 모았다. 이를 중소기업청에 전달해 긴급자금이 필요한 기업에 빌려줬다.
 
70년대 경제성장 주도한 공동체 정신도 기여
 
한국은행은 금 모으기로 확보한 금 일부를 매입 했다. [중앙포토]

한국은행은 금 모으기로 확보한 금 일부를 매입 했다. [중앙포토]

당시 행사장에 왔던 조해녕 내무부 장관은 이 행사를 고건 국무총리에게 보고했다. 이후 농협중앙회·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 여러 단체가 참여해 98년 1월 5일 ‘금 모으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기부가 아닌 금을 내놓고 돈을 받아 가는 형태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다.
 
98년 한 해 동안 금 모으기에 참여한 국민은 약 351만 명이다. 총 227t의 금이 모였는데 당시 가치로 환산해 21억 달러(약 2조5000억원)어치에 달했다.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다. 정 전 회장이 추진한 초기 캠페인의 원동력은 70년대 경제 성장을 주도한 공동체정신으로 볼 수 있다. ‘국가가 망하면 개인도 살 수 없다’는 개발세대식 사고도 있었다. 여기에 한국 여성 특유의 네트워크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로 불리는 사회지도층의 책임의식도 캠페인 확산에 기여했다.
 
장영애(70) 전 경남도부녀회장은 “지역마다 금붙이가 있는 시장·군수, 국회의원 부인을 골라 찾아다녔다”며 “군수 사모님이 믿고 냈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덩달아 동참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국난을 극복하려는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금 모으기가 긍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다. 정 전 회장은 “초기 기부 방식으로 진행했다가 나중에 보상판매로 전환했지만 누구 하나 다시 돌려달라는 요청이 없었다”며 “이름 없는 여성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년이 지난 현재에도 금 모으기 운동은 외환위기 극복을 상징하는 집단기억이 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외환위기 20년을 맞아 최근 실시한 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42.4%가 외환위기 하면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것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꼽았다.
 
국민 42%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가장 기억”
 
가락지 모으기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난달 21일 경남 창원시 새마을회관에 모였다. 왼쪽부터 주경효 전 함안군부녀회장, 정행길 전 새마을부녀회연합회장, 장영애 전 경남도부녀회장, 오성자 전 김해시부녀회장. 이들의 손가락엔 가락지가 없다. [송봉근 기자]

가락지 모으기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난달 21일 경남 창원시 새마을회관에 모였다. 왼쪽부터 주경효 전 함안군부녀회장, 정행길 전 새마을부녀회연합회장, 장영애 전 경남도부녀회장, 오성자 전 김해시부녀회장. 이들의 손가락엔 가락지가 없다. [송봉근 기자]

유로존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2010년 5월 1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인들이 나랏빚을 갚는 데 쓰라고 자신의 결혼반지를 내놓기 위해 줄을 설 수 있을까. 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인은 그렇게 했다”고 보도했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실제 경제적 효과보다는 위기 극복의 의지를 보여 줬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금 모으기 운동이 민간 주도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현장의 에너지가 모집운동에만 그쳐 사후 처리·관리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정 전 회장은 당시 모은 금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그게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당시 금을 한꺼번에 수출하느라 국제 금값이 떨어져 제값을 받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예 당시 금을 외환보유액(한국은행이 3t만 매입)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나았다는 비판도 있다.
 
“지금 다시 금 모으기를 하면 잘될 것 같으냐”는 물음에 정 전 회장을 비롯한 부녀회장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요즘은 공동체를 생각하면 바보 취급을 한다” “다들 이기적이 돼 자기 것을 선뜻 내놓기는 힘들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과제는 금을 모으는 게 아닌 ‘사회적 자본’을 쌓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구성원이 공동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신뢰와 규범 등 무형자산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은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이룬 상황에서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공동체의식이 발휘된 것”이라며 “이제는 양극화가 진전되고 사회적 자본이 약해지면서 이런 운동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를 해소하고 사회적 자본을 쌓기 위해선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임원혁 KDI 글로벌경제연구실장은 “이제는 성장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는 포용적 성장을 통해 사회 응집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창원=심새롬 기자, 하현옥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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