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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인연으로 완성…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작은 인연들”

피수영 대한신생아학회 명예회장은 2011년 서울아산병원을 퇴직하고 하나로의료재단 고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수필가 피천득의 차남인 그는 국내에선 생소했던 신생아학을 개척해 1만 명의 미숙아를 살렸다.

피수영 대한신생아학회 명예회장은 2011년 서울아산병원을 퇴직하고 하나로의료재단 고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수필가 피천득의 차남인 그는 국내에선 생소했던 신생아학을 개척해 1만 명의 미숙아를 살렸다.

“인생은 작은 인연으로 아름다워…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작은 인연들”
 
‘(피씨가) 희성이긴 하지만 어찌하여 역사에 남은 이름이 그다지도 없었던가. 알아보니, 피씨의 직업은 대개가 의원이요. 그중에서는 시의(임금, 왕족을 진료하는 의사)도 있었다는 것이다…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옥관자는 못 달더라도 우간다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올 것이다.’
 
수필 『인연』으로 유명한 故피천득 서울대 명예교수가 1965년 발표한 수필 ‘피가지변’(皮哥之辨)의 일부다. 이 수필에 등장하는 ‘아이’가 피천득 교수의 차남인 피수영(74) 대한신생아학회 명예회장이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고 있던 수필 속 22세 의대생은 이제 산수(傘壽, 80세)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술을 배웠고, 한국에 돌아와 신생아학 분야 명의가 됐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해 2011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정년퇴임 할 때까지 그의 손을 거친 미숙아만 1만명을 훌쩍 넘는다. 2000년에는 국내 의료진과 함께 468g의 초미숙아를 성공적으로 살려내기도 했다. 퇴직 후 현재는 하나로의료재단 고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1943년생이면 해방되기 2년 전에 태어났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경성제국대학 예과(현 서울대 사범대) 교수라 해방 후에는 중구 장충동에 있는 사택에서 살았다. 1945년 8월 15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나를 발가벗겨서 옷 대신 온몸에 태극기를 두른 채, 목마를 태우고 거리에 나가 ‘만세’를 외쳤다. 사실 내가 기억을 하는 건지, 주변에서 얘기를 해줘 아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서울사대부속국민학교(현 서울사대부초) 2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형(피세영, 캐나다에서 사업 중)은 당시 외할머니 댁에 살고 있어서 먼저 피난을 떠났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피서영, 미국 보스톤대 물리학과 교수)은 다음해인 1951년 1.4후퇴 때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4살이었던 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나는 걸어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계속 걷기만 하니까 배도 고프고 지쳤다. 천안쯤에서 아버지가 보초를 서고 있던 영국 군인한테 초콜릿을 얻어다줬는데, 평생 먹어본 초콜릿 중 가장 맛있었다.”
 
피난 중에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를 쓰신 주요섭씨 댁에도 머물렀다.
주요섭씨는 아버지와 상하이 후장대 선후배 사이라 친분이 두터웠다. 주요섭씨가 당시 부산에 머물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구 교회 강당에서 목사님 가족들과 같이 지내다가 아버지가 미군부대에 요청해 기차 한 칸을 얻어 타고 부산으로 갔다. 주요섭씨 집에서는 1~2주 정도 신세를 지고, 이후 부산의 하단인가 서대신동인가에서 초가집 단칸방을 얻어 세 들어 살았다. 당시 옆방 사람이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부대에서 얻어온 ‘짬밥’을 다 같이 나눠먹고 그랬다. 군대에서 먹다 버린 음식 쓰레기로 연명한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피수영 회장이 2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찍은 삼남매 사진. 왼쪽부터 피수영 회장, 형 피세영씨, 동생 피서영씨. 피세영씨는 현재 캐나다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피서영씨는 보스톤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진 피수영]

피수영 회장이 2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찍은 삼남매 사진. 왼쪽부터 피수영 회장, 형 피세영씨, 동생 피서영씨. 피세영씨는 현재 캐나다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피서영씨는 보스톤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진 피수영]

피난 중에 학업은 어떻게 했나.
부산 피난 중에 임시 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거의 안다녔다. 1953년 9월에 전쟁을 휴전하고 서울환도 후에 다시 서울사대부속국민학교를 다니게 됐다. 원래대로면 2학년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그냥 4학년에 집어넣었다. 4학년 때 구구단 외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사대부중고를 나왔다. 아버지가 서울사대 교수로 재직 중이라 자연스럽게 서울대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던 아버지 보며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
 
아버지가 서울대 교수였는데 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피난 중 서울대가 임시로 열렸을 때, 아버지가 대학입학시험 출제위원을 맡았었다. 한 학부모가 ‘내 아이 잘 봐 달라’는 의미로 쌀 한가마니를 선물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쌀을 받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판단해 손도 안 댔다. 시간이 지나서 마당에 있는 쌀이 썩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돌려줬다더라. 이렇듯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올곧게 사셨다.”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겠다.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큰돈을 벌 기회는 많았다. 일제 강점기 이후 미군정 때 미군 사령관의 눈에 들어 요직을 맡을 수도 있었다. 당시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이 아버지에게 관사도 제공하고 이사급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아버지는 거절했다.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게 돈 버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서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런 이유인가.
의사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이 있었다. 6살 때 열이 심하게 났는데, 당시 우리 사택 건너편에 살고 있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서울대 교수 부인이었다. 그때 그분은 고열이 나는 이유를 ‘열대성 말라리아’라 진단하고 매일 큰 주사를 놔줬다. 그래도 열이 내려가지 않자 아버지가 당시 종로에서 유명했던 ‘이병남 소아과’에 데려갔다. 그분의 진단명은 ‘재귀열’이었다. 같은 증상을 두고 다르게 진단을 내린 것이다. 그곳에서 일주일 치료 받고 깨끗이 나았다. 이병남 선생은 나중에 북한으로 월북해 우리나라로 치면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했다고 들었다.”
피수영(오른쪽) 회장의 서울사대부속중학교 졸업사진. 아버지(수필가 故 피천득)가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재직 중이라 서울대 사택에 살았고, 자연스레 서울대사범대부속 초,중,고를 졸업했다. [사진 피수영]

피수영(오른쪽) 회장의 서울사대부속중학교 졸업사진. 아버지(수필가 故 피천득)가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재직 중이라 서울대 사택에 살았고, 자연스레 서울대사범대부속 초,중,고를 졸업했다. [사진 피수영]

“유년시절 주치의였던 이국주 교수 보며 의사의 꿈 키워”
 
소아과학의 산 증인인 故이국주 서울대 교수와도 인연이 있다고.
이국수 서울대 소아과 교수는 아버지와 경기고 동창이라 친했다. 어렸을 때 아플 때마다 이국주 선생을 찾아갔다. 서울대병원에 찾아가면 목도 들여다봐주고, 배도 만져보고, 가슴 청진도 해주는 등 꼼꼼하게 진료를 봐줬다. 몸이 아프다가도 그분에게 진료를 받으면 깨끗이 나았다. 중학교 때는 동생의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국주 선생에게 주사 한 대 맞고는 싹 나았다. 어린 마음에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분 같은 의사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은 의대 입학 경쟁률이 굉장히 높은데, 예전에도 그랬나.
그때는 서울대 공대, 그중에서도 화학공학과·전기과·기계공학과가 인기가 많았다. 의대는 그 다음 순위였다. 서울사대부고가 남녀 각각 2개 학급씩 총 4개 학급이었는데, 그중 10명 정도가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요즘 의사가 되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년이 없고, 돈을 많이 벌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의사는 양심적으로 일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환자를 보는 시간이 제한돼 있는데, 재벌이 될 정도로 돈을 벌수가 없지 않느냐. 왜 그렇게 의대에 가려고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피수영(가운데) 회장이 서울대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당시 맹장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사진 피수영]

피수영(가운데) 회장이 서울대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당시 맹장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사진 피수영]

1967년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에 소아과 레지던트를 시작했다.
원래는 흉부외과에 지원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돈 많이 벌고 일하기 편한 성형외과·안과·피부과가 인기라는데, 그때는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 일반외과·내과에 지원했다. 소아과를 전공하게 된 계기도 이국주 선생과 관련 있다. 이국주 선생이 당시 서울대병원 소아과 과장이었다. 하루는 이국주 선생이 부르더니 ‘피군, 소아과를 좀 해보지’ 하시더라. 아버지 같은 분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소아과를 선택했다.”
 
그때는 의료시설도 지금과 달랐을 것 같다.
말도 못하게 열악했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서울대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치료할 수 있는 환자들도 당시에는 많이 살리지 못했다. 소아과에서는 파상풍으로 목숨을 잃는 애들이 많았다.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 가위를 제대로 소독하지 않고 탯줄을 자른 게 문제가 됐다고 본다. 아이가 파상풍에 걸리면 경기를 일으키고 숨을 제대로 못 쉰다. 서울대 병원에도 소아용 자동 인공호흡기가 하나도 없어서 인턴들이 밤새 튜브를 잡고 환자에게 수동으로 산소를 공급해줬다.”
 
“유학시절 고생 말로 못하지만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한 것 보람돼”
 
1975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대 동기 125명 중에 70명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선진 의료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다. 당시 미국에서도 한국 의사들을 잘 받아줬다. 월남전에 군의관으로 파견된 의사들이 많아서 미국 내에 의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동기들은 일찍 군대 갔다가 미국으로 유학 갔는데, 서울대에서 레지던트 하느라 군 입대가 늦어졌다. 3년 동안 군의관을 하고 나오니 전쟁이 끝나버렸더라. 미국에서 한국의사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군대 가기 전에 영주권 신청해 놓고 갔는데, 제대하고 나오니 ‘6개월 안에 미국에 오지 않으면 영주권이 취소된다’는 통보가 와 있었다. 영주권만 확보해 놓을 생각에 편도 비행기 티켓과 120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떠났다.”
 
타지에서 공부하느라 고생 많이 했겠다.
우선 일자리를 못 구했다. 3개월 백수로 지내고, 3개월은 실험실에서 일했다. 그러다 운 좋게 보스톤 근처 세인트메리 병원에 레지던트로 취직이 됐는데, 영어를 잘 못하니까 괄시를 받았다. 당시 레지던트 월급이 일주일에 80달러였는데, 방값 내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침대, 책상 들어가면 빈 공간이 거의 없는 협소한 방인데도 그랬다. 또 주인 할아버지가 구두쇠라 하루에 샤워를 두 번하면 ‘물 많이 쓰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가 나를 보러 미국에 왔다가 울고 가셨다. 한국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미국에서 왜 이런 고생을 하냐는 거다. 그래도 그때 우리세대가 미국에서 선진기술 배운 덕분에 우리나라 의학이 이만큼 발전한 게 아닐까 싶다.”
피수영 회장이 미국 유학시절 전임의로 일하면서 연구실에서 찍은 사진. 원래 소아심장학을 전공하려고 했지만 스승인 홍창의 당시 서울대병원장의 조언으로 신생아학을 전공하게 됐다. [사진 피수영]

피수영 회장이 미국 유학시절 전임의로 일하면서 연구실에서 찍은 사진. 원래 소아심장학을 전공하려고 했지만 스승인 홍창의 당시 서울대병원장의 조언으로 신생아학을 전공하게 됐다. [사진 피수영]

국내에는 생소했던 신생아학을 한 계기는.
원래는 소아심장학을 전공하려고 했는데, 당시 서울대병원장을 맡고 있던 홍창의 교수가 신생아학을 하라더라. 한국에 소아심장학을 하는 사람은 이미 많고, 신생아학 분야가 뒤처져 있다는 조언이었다. 서울대부속병원에 아동병원이 생기면 그곳으로 오라고도 했다. 그래서 신생아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980년부터 15년 동안 미국 미네소타 북쪽에 있는 ‘둘루스 클리닉’에서 신생아과장으로 근무했다.”
 
1995년부터는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에서 일했다.
홍창의 교수가 서울대병원서 정년퇴임하고 나서 1989년 문을 연 서울중앙병원 소아과 과장을 맡게 됐다. 미국에 있는 나한테 여러 번 전화해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서울중앙병원이 문을 열기 1년 전 한국에 와서 의사들 교육시키고, 신생아중환자실 만드는 데도 도움을 줬다. 바로 한국에 나오지 못한 건 솔직히 돈 문제였다. 서울올림픽을 마치고 서울 집값이 수직으로 치솟을 때다. 미국에 있는 큰 집을 팔아도 서울에서 전셋집 하나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미국에서 돈을 좀 더 모아서 1995년에 한국으로 오게 됐다.”
2006년 피수영(왼쪽) 회장 초청으로 미국 신생아학의 대가인 에이버리 파나로프(가운데) 박사가 서울아산병원을 방문해 강연을 열었고, 이후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피수영]

2006년 피수영(왼쪽) 회장 초청으로 미국 신생아학의 대가인 에이버리 파나로프(가운데) 박사가 서울아산병원을 방문해 강연을 열었고, 이후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피수영]

“서울아산병원에 국내 최초 신생아분과 신설 2000년엔 468g 초미숙아도 살려”
 
서울중앙병원에서 일한지 1년 후 신생아분과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소아과에서 신생아 진료도 같이했다. 하지만 신생아 분야는 소아과와 다르다. 미숙아나 저체중아를 돌보는 분야다. 서울중앙병원에서 처음으로 소아과에서 신생아분야를 분리한 것이다. 보통 임신해서 37주 미만에 태어나는 아이들을 미숙아로 분류하는데 2.5kg 이하 신생아는 저체중아, 1.5kg 이하 신생아는 극소 미숙아로 분류한다. 이런 애들은 모든 장기의 발달이 미숙해서 호흡기질환이나 뇌출혈 등이 많다. 특히 28주 미만의 애들은 엄마에게서 항체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태어나기 때문에 감염이 잘된다. 세심한 진료가 필요하다.”
 
신생아과를 신설하면서 가장 먼저 뭘 했나.
당시 민병철 서울중앙병원장이 ‘돈 걱정 하지 말고 최고의 신생아중환자실을 만들라’고 하더라. 인큐베이터, 신생아호흡기, 산소분석기 등 의료기계를 최고급으로 들여왔다. 또 신생아중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생아전문 간호사를 교육시켰다. 신생아 분야에서는 의사보다 간호사 역할이 더 중요하다. 미국에서 같이 일했던 간호사 3명을 교대로 아산병원에 오게 해 3개월 동안 한국 간호사 40~50명을 교육시켰다. 그 외 소아외과, 신경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과 협진 체제를 이뤘다.”
1995년 피수영(오른쪽) 회장 제안으로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신생아 전문 간호사들(왼쪽 두 번째, 세 번째). 당시 피 교수는 미숙아 치료를 위해 간호사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 미국에서 같이 일하던 간호사를 서울아산병원에 초청해 한국 간호사 50여 명을 3개월 간 교육시켰다. [사진 피수영]

1995년 피수영(오른쪽) 회장 제안으로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신생아 전문 간호사들(왼쪽 두 번째, 세 번째). 당시 피 교수는 미숙아 치료를 위해 간호사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 미국에서 같이 일하던 간호사를 서울아산병원에 초청해 한국 간호사 50여 명을 3개월 간 교육시켰다. [사진 피수영]

2000년에는 468g의 초미숙아를 살려냈다.
정말 작은 아기였다. 주변에서 살리기 어려울 것이란 얘기도 많이 했다. 혼자 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숙련된 의사와 간호사, 좋은 의료 장비, 부모들의 열성, 아이의 의지 등이 합쳐진 결과다. 468g이면 고기 한 근보다 무게가 적은 것이다.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됐었다. 요즘에는 더 작은 애들도 살릴 수 있다.
 
신생아학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예전에는 10개월을 못 채우고 태어난 애들을 부모도 살릴 생각을 안 하고, 의사들도 손을 못 썼었다. 이제는 1000g 이하는 많이 살린다. 처음 한국에 올 당시엔 미국·일본에 많이 뒤처져 있었지만, 이제 우리나라 신생아 분야도 거의 세계적인 수준까지 올라갔다. 2011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정년퇴임하기까지 16년 동안 1만 명 정도의 아기들을 살렸다. 여러 사람이 도와줬기에 가능했다.
피수영(왼쪽) 회장이 2004년 아버지 피천득 교수와 함께 상해 여행갔을 때 찍은 사진. 피 회장은 "항상 정직하게 살라"는 아버지의 말을 평생 지키며 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사진 피수영]

피수영(왼쪽) 회장이 2004년 아버지 피천득 교수와 함께 상해 여행갔을 때 찍은 사진. 피 회장은 "항상 정직하게 살라"는 아버지의 말을 평생 지키며 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사진 피수영]

“돈 벌려고 의사하는 현실 안타까워 사람 생각하는 희생정신 우선돼야”
 
이 시대 젊은이, 의사 지망생들에게 조언한다면.
요즘 젊은 사람들 살기 힘든 것은 잘 알고 있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로스쿨 졸업하고 취업 못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더라. 경쟁이 치열해 그런지 젊은 애들이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서로 배려하고 선의의 경쟁을 했으면 좋겠다. 의사 지망생들은 일이 적성에 맞는지 고민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돈을 잘 벌기 때문에 의예과를 선택하면 안 된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희생정신이 우선돼야 한다.”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아버지가 항상 얘기하던 게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외과의사를 하려다 이국주 선생의 권유로 소아과를 했고, 소아심장학을 전공하려다 홍창의 교수의 권유로 신생아학을 하게 됐다. 두 사람과의 인연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 우리 인생을 완성시키는 것은 이처럼 작은 인연들이 아닐까 싶다.”
 
인생을 살면서 꼭 지키려고 했던 것.
항상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다. 아버지는 평소에 도산 안창호 선생을 존경했는데, 그가 진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않으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안창호 선생은 ‘만약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동지에게 큰 해가 돌아갈 때만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들었다. 늘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지만,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땐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했다. 서울대 의과대학 2학년 때 거짓말 했다 걸린 적이 있다. 당시에는 부모에게 교재 값을 부풀려 받은 뒤에 이를 용돈으로 쓰는 대학생이 많았는데, 나도 그랬다. 예컨대 10만원 하는 원서 가격을 30만원으로 속여 아버지에게 돈을 받은 후 20만원을 남기는 식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치는 게 아니니 잘못된 행동이라는 생각을 안 했다. 학생 책값으로는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여긴 아버지가 서점 사장에게 따져 묻는 바람에 사실이 밝혀졌다. 서점 사장이 ‘요즘 대학생들 다 그런다’며 나쁜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새벽 2시에 자는 나를 깨워 혼을 내시더라. 다음 날 시험이었는데 잠도 못 자고, 혼나느라 공부도 못해 결국 모든 과목을 재시험 치렀다. 그때 이후로는 다시는 거짓말 안하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글 전민희 기자
사진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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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