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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서울은 이미 서양인도 감탄한 ‘근대적 대도시’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13> 광무개혁과 궁내부
대한제국의 근대화 철학인 신구 절충의 구본신참론은 정궁이었던 경운궁(현재 덕수궁)에서도 확인된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정관헌·구성헌·돈덕전·중명전·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을 신설했다. 중화전 오른편에는 석어당·함녕전·준명당·즉조전 등 전통 건물이 배치됐다. 1897년 계획이 수립돼 1910년 완공된 대표적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영국인 존 레지널드 하딩이 설계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철학인 신구 절충의 구본신참론은 정궁이었던 경운궁(현재 덕수궁)에서도 확인된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정관헌·구성헌·돈덕전·중명전·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을 신설했다. 중화전 오른편에는 석어당·함녕전·준명당·즉조전 등 전통 건물이 배치됐다. 1897년 계획이 수립돼 1910년 완공된 대표적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영국인 존 레지널드 하딩이 설계했다.

석조전 실내 중 가장 화려하고 위엄 있게 조성된 접견실. 실내 의장의 설계와 시공은 영국 메이플사가 맡았다. [사진 문화재청]

석조전 실내 중 가장 화려하고 위엄 있게 조성된 접견실. 실내 의장의 설계와 시공은 영국 메이플사가 맡았다. [사진 문화재청]

대한제국의 존재 이유는 항일 독립전쟁이었지만 그 전쟁도 경제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다. 고종의 개혁 철학인 구본신참론(舊本新參論)에 의거한 근대화 개혁은 짧은 기간 내 효과적으로 진행됐다. 당시의 근대화정책을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를 붙여 ‘광무개혁’이라 부른다. 광무개혁의 성과 또한 항일 독립전쟁만큼이나 눈부신 것이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궁내부 469명 근무, 근대화 총괄
항일 독립전쟁·개혁 자금 확보

국공립·사립 학교 2236개 설립
일제 병합 후 오히려 서당이 늘어

1901년 전신·전화·전차·전기 갖춰
북경·동경·방콕 등 대도시 앞질러
위스키·안경 등 서양 물건 유통

일본군과 일본공사관이 들여다볼 수 없는 ‘국내 망명지’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새롭게 배치된 궁내부와 원수부는 광무개혁의 쌍두마차였다. 원수부가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국방력 강화를 지휘했다면(중앙SUNDAY 11월 19일자 참조) 이번에 살펴볼 궁내부는 근대화 개혁을 총괄했다. 근대화 사업 관련 새 기구들은 모두 궁내부에 귀속됨으로써 1903년께 궁내부는 총 인원이 469명에 달하는 방대한 부서로 자리 잡았다.
 
대한제국이 수행한 항일 독립전쟁과 근대화 개혁 자금은 모두 궁내부가 확보한 재원으로 충당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세수 확보와 철저한 보안이 필수적이었다. 궁내부의 재정 권한은 궁내부 내장원에 집중됐고, 고종의 최측근이자 내장원경인 이용익이 전적으로 업무를 관할했다.
 
문화적 근대화와 학교 건립 확산
‘문화적 근대화’가 시작된 것도 대한제국 시기였다. 정부 공문서의 국문화 혹은 국한문화가 시행됐다. 순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은 ‘국문 생활’의 막을 열었다. 오늘 우리가 쓰는 한글의 기본 형태는 이 시기에 거의 완성됐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면 고종은 국문(나라의 문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고종이 태극기를 국기로 선포한 데 이어 애국가와 무궁화 등이 자연발생적으로 ‘국가의 상징’으로 지정됐다. 이는 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이 붐을 이루며 신설됐다. 1909년 11월 현재 대한제국의 국공립과 사립학교는 모두 2236개였다.(대한매일신보 1909.11.11. ‘잡보:학교 총수’) 그러나 학교 설립은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급격히 줄었고, 그때부터 오히려 전근대적 서당이 늘었다. 1910년 무렵 1만6500개였던 서당은 1919년께 2만3500개로, 서당 학생 수는 14만 명에서 26만8000명으로 급증했다.(박득준, 『조선근대교육사』 213~214쪽) 대한제국 시기의 ‘교육 근대화’ 성과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됐던 것이다.
 
대한제국은 서울 도시개조사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주미 공사를 2년간 지냈던 한성부판윤 이채연이 ‘워싱턴DC’를 모델로 했다. 이채연은 황토현(현재 광화문 부근)~흥인문, 광통교(광교)~남대문의 도로 폭을 50척으로 하는 도로계획 법령을 공포·시행했다. 더럽고 지저분했던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로 변모해 갔다.
 
1887년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경복궁 내 건청궁에 가설한 전등은 그 시점만 해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것이었는데 1900년 4월 10일부터는 종로 거리를 시발로 서울의 모든 대로에 전기 가로등까지 켜지기 시작했다. 1896년 10월 2일에는 덕수궁~인천 사이에 시외 전화가 개통됐고, 서울시는 곧 100회선의 전화를 개설했다. 서울의 전화 개설은 알렉산더 벨이 1876년 전화를 발명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고, 동경(도쿄)의 전화 설치와 거의 동시였다.(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328~355쪽)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에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다. 사진은 1899년 5월 개통된 전차가 돈의문(서대문)을 통과하는 모습.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서울의 전차 운행은 동경보다 2년, 홍콩보다 5년, 상해보다 9년, 북경보다 25년이나 빨랐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사진 서울시립대 박물관]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에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다. 사진은 1899년 5월 개통된 전차가 돈의문(서대문)을 통과하는 모습.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서울의 전차 운행은 동경보다 2년, 홍콩보다 5년, 상해보다 9년, 북경보다 25년이나 빨랐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사진 서울시립대 박물관]

1899년 5월엔 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교토와 방콕을 제외하고 동경(1901년 개통), 홍콩(1904년 개통), 상해(상하이·1908년 개통), 북경(베이징·1924년 개통) 등 동아시아 대도시 어디에서도 전차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1899년 9월엔 인천~노량진 간 철도가 개통됐다. 1900년 7월엔 이촌동~동작구 사이 한강철교가 완공됐다. 거의 동시에 노량진~남대문 간 철도가 완공돼 경인선 전부가 개통됨으로써 하루 4회 경인선 기차가 운행됐다.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를 보면 당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서양 물건을 파는 상점의 품목을 보면 서양 문물은 이미 대한제국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위스키·맥주·포도주·안경·경대·시계·양산·양복·수건·모자·장갑·가죽지갑·반지·허리띠·장난감·유성기·서양악기·문방구·의자·난로·천리경·우표·철도시간표·선박시간표·우유 등 서양식료품·여행장비·직조기·재봉틀·운동기구·자전거 등을 일반인들도 구입할 수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물건은 대부분 대한제국기에 도입된 것들이다.(현광호, 『대한제국의 재조명』 232~233쪽)
 
오스트리아 작가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이 본 ‘1894년 여름 서울’의 풍경은 참담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오물과 똥이 천지인 도시”였고 “서울에 밤이 찾아오면 온 천지가 깜깜하고 여기저기 겨우 희미한 불빛만 깜박거릴 뿐”이었다.(Ernst von Hesse-Wartegg, Korea 1894, 54쪽, 131~132쪽)
 
그러나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박사가 본 서울은 광무개혁 7년 만에 서양인이 감탄할 정도의 ‘근대적 대도시’로 달라졌다. 겐테는 서울이 유일하게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다 가짐으로써 북경·동경·방콕 등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당시 서울의 풍광을 이렇게 묘사한다.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서울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훨씬 순수하다.”(Siegfried Genthe, Korea: Reiseschilderungen, 227쪽)
 
고종은 서구 문물 수용에 무조건적이지도 않았지만 배타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정척사파 대 친일개화파’의 이분법으로 한국 근대사를 서술하면서 고종과 근왕세력을 척사파 쪽에다 위치시켜 놓곤 한다. 대한제국에 대한 왜곡은 이 구도에서 비롯된다. ‘척사파=수구파’ ‘친일개화파=개혁파’로 서술하면서 고종과 근왕세력을 수구파에 배치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아관망명 후 고종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근대화 개혁을 적극화하고 가속화했다. 그는 일련의 칙유를 통해 그간 국망의 재앙을 초래한 동도서기론과 친일개화론을 둘 다 비판하고 구본신참론을 새로운 근대화 철학으로 제시했다. “구장(舊章)을 따르면서 신규(新規)를 참작하고 민국의 편의와 관계된 것은 참작 절충해 꼭 실행하기를 힘쓴다”(『고종실록』 1896.9.24)고 했다. 또 “구규를 본으로 삼고 신식을 참작하는 것(以舊規爲本 參以新式)”이라며 “자국 법제를 버리고 일률로 타국 제도를 추종하는 것이 어찌 개혁이겠는가?”(『秘書院日記』 1897.1.20)라고 밝혀 놓았다.
붉은 벽돌과 서양식 기둥에 팔작지붕의 전통 양식이 조화를 이룬 경운궁 내 정관헌. 연희와 휴식공간으로 사용됐다. [중앙포토]

붉은 벽돌과 서양식 기둥에 팔작지붕의 전통 양식이 조화를 이룬 경운궁 내 정관헌. 연희와 휴식공간으로 사용됐다. [중앙포토]

 
식산흥업정책과 경제의 근대화
구본신참론은 ‘국도(國道)’와 ‘국기(國器)’를 본으로 삼되 신문물의 ‘참작’(한국화)에 의해 혁신하는 신구 절충의 개혁 철학이었다. 이는 국도와 국기를 둘 다 민족자주적으로 근대화함으로써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중도개혁 노선으로서, 개화파의 전통파괴적·반민족적 개화 지상주의를 배격하면서 동도서기론도 물리쳤다. 동도서기론은 ‘서기(西器)’는 직수입하되 ‘서도(西道)’는 무조건 배척하고 몰(沒)민족성·사대주의·반상차별·여존남비 등의 ‘동도(東道)’는 고수했기 때문이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925~1014쪽)
 
서울의 근대적 변모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제국 초기에 농상공부가 주관해 심혈을 기울인 업무는 제언(堤堰·둑) 수축을 통한 농업용 저수지 건설과 황무지 개간이었다. 동시에 양잠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농업·양잠업 진흥정책에 힘입어 농림회사들이 잇따라 창설됐다. 농림업 부문 최초의 회사는 1899년 정부 관리와 유학생 출신들이 함께 세운 ‘대한제국인공양잠합자회사’였다. 합자회사라는 명칭도 이 회사가 최초다.(황성신문 1900.11.21) 이후 개간회사·목양사·양잠회사(1900), 농업회사(1901), 농광(農鑛)회사·인공잠농회사(1904) 등이 속속 등장했다. 활발하게 근대적 농업회사들이 설립됐으나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탈이 가혹해지면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게 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농업·양잠업과 함께 상공업 진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상공업 교육과 기술을 보급하면서 회사 설립을 장려하고 외세 침투로부터 상공인들을 보호했다. 1896년 아관망명부터 1904년까지 9년 동안 무려 205개의 회사가 창설됐다. 금융업 11개, 농림업 16개, 제조업 18개, 광업 9개, 상업 67개, 운수업 27개, 수산업 3개, 청부토건업 14개, 기타(인쇄·출판·제약·매약·유흥업·용역업 등) 분야에서 40개였다.(전우용, 『한국 회사의 탄생』 130~137쪽)
 
1910년 당시 납세를 하는 공식 부문의 근대적 대기업(당시 종업원 100명 기준)은 도합 703개로 추산되고 있다. 상업·금융·공업·운수교통·토건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비공식 부문의 무허가 중소기업들까지 합하면 대한제국기에 이미 수많은 기업이 거의 매일 생겨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자본의 침투로부터 국내 상업을 보호하면서 조세를 거둬 세수를 늘렸다. 내장원과 관료들은 이렇게 축적된 세수를 ‘관료자본’으로 전환시켜 산업에 투자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신속한 자본주의화’를 열어 가고자 했다. 관료자본의 투자 활동은 은행 설립(1898년 특립제일대한은행, 1899년 대한천일은행), 철도 건설, 전기회사 설립, 연초제조회사 설립 등으로 나타났다.(이영학, ‘대한제국의 경제정책’ 48~49쪽)
 
대한제국 정부는 후발자본주의 국가 독일처럼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독일처럼 보호관세를 부과하는 정책은 외국 영사관들의 압박으로 인해 채택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기존의 상업단체들인 도고·수세회사·상무사 등의 독점권을 인가함으로써 외국자본의 시장 잠식으로부터 국내 상공업을 보호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1054~1055쪽)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인 캐나다인 프레더릭 매켄지 등은 광무개혁의 성과를 적극 인정했다.(Homer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456쪽. Frederic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62~63쪽) 지한파 구미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했던 일제 고위 관리의 발언도 주목된다. 1900년 2월 19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외무대신에게 “무릇 상업상 당국(한국)의 지위는… 단순한 상업시대에서 공업시대로 들어서는 데 이르러 한두 동양 국가들과의 관계로부터 나아가 세계적 경쟁 영역에 임하고 있다”고 기밀보고를 했다.(『일본공사관기록』 1900.2.19) 1904년 10월 29일에는 “한국의 무역은 해마다 다소 소장(消長)이 있지만 발달의 추세가 현저하다”는 보고도 했다.(이태진, ‘일본도 광무 근대화 성과 예의 주시했다’ 150쪽)
 
대한제국의 경제 성장은 각종 통계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1897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 정부의 세출예산을 보면 대한제국은 창건 9년 만에 예산이 약 4.6배나 늘었다. 경제 규모가 그만큼 늘어났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이윤상, 『1894~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 ‘표:1900년 전후의 세출예산 및 군사비 규모 증가 추세’)
 
1990년대 이후 러시아 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드러난 대한제국 수출의 증가 상황도 참고할 만하다. 대한제국의 무역 총량은 1901년 1800만 엔을 상회했고, 1904년에 곱절이 되었으며, 1910년엔 6000만 엔에 육박했다. 대한제국의 1910년도 수출액이 1901년에 비해 무려 5.4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한국의 주요 무역 상대국은 일본·중국·러시아·미국·영국 등이었다.(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요약집』 513쪽)
 
오랜 세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제통계의 책임을 맡았던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의 통계자료도 있다. 매디슨이 2012년 산출한 한·중·일 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통계를 보면 한국 경제는 늦어도 개항 훨씬 전인 1869년 이전에 저점을 통과했고, 대한제국기 전반에 걸쳐 고도성장이 진행됐다.
 
매디슨 통계에 따르면 1911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815달러로 아시아 4위에 올랐다. 1915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048달러에 달해 미국 치하의 필리핀(875달러)과 네덜란드 치하의 인도네시아(866달러)도 뛰어넘어 ‘아시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나타났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1060~1062쪽)
 
1911년 1인당 국민소득 815달러로 亞 4위
1906년 이후 일제 통감부의 정책이 대한제국의 고도성장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재정고문이 부임할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훈령이 ‘대한시설강령’(1904년 10월 일본 각의 결정)이었는데, 여기엔 대한제국 경제를 진흥할 수 있는 그 어떤 식산흥업정책이나 개발투자계획도 들어 있지 않았다. ‘대한시설강령’ 중 경제 관련 항목은 ‘재정기관을 감독하고 정리할 것’ ‘교통·통신기관을 장악할 것’ ‘척식(拓植)을 기도할 것(한국의 영토나 미개지를 약탈해 일본인의 이주 정착을 촉진)’뿐이었다.(김운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 119쪽)
 
1911년의 815달러는 순수하게 대한제국의 경제 성과를 보여 주는 통계라는 얘기다. 1915년께의 1048달러도 대한제국에서 조성된 경제 도약의 여파가 이어진 결과였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5년 동안에도 일제 총독부는 아무런 식산흥업정책이나 개발 투자 없이 무단정치에 의거한 토지 약탈, 경제구조 왜곡(식민지 예속화)에만 부심했기 때문이다.
 
1915년 1인당 국민소득 1048달러에 도달한 한국의 생활 수준은 당시 유럽과 비교해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1915년 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5288달러, 미국 4864달러, 프랑스 3248달러, 독일 2899달러, 오스트리아 2653달러, 이탈리아 2070달러, 스페인 2033달러, 포르투갈 1228달러(1918년에는 1150달러), 그리스 1143달러(1916년은 972달러, 1917년은 848달러)였다. 1915년 당시 한국의 생활 수준은 서유럽의 변방 국가들(포르투갈·그리스 등)과 대등하거나 곧 이 국가들을 앞지를 기세였던 것이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1060~1065쪽)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서울시립대 박물관.

 
참고자료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청계· 2017), 『한국 회사의 탄생』(전우용·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1), ‘대한제국의 경제정책’(이영학·한국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 편·『대한제국의 토지제도와 근대』·혜안·2010),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요약집』(박종효 편역·한국국제교류재단·2002),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일본도 광무 근대화 성과 예의 주시했다’ (이태진·교수신문 편·『고종황제 역사청문회』·푸른역사·2008), 『1894~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이윤상·서울대 박사학위 논문·1996), 『대한제국의 재조명』(현광호·선인·2014),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김운태·박영사·1986·1999), 『조선근대교육사』(박득준·한마당·1989)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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