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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사다트의 역사 도전, 전쟁을 결심해야 평화를 얻는다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1973년 10월 전쟁, 이집트의 이스라엘 기습 
 
‘10월 전쟁 파노라마 박물관’의 조각상. 고무보트를 탄 알사카 특수부대원들의 역동적인 수에즈 운하 도하 장면.

‘10월 전쟁 파노라마 박물관’의 조각상. 고무보트를 탄 알사카 특수부대원들의 역동적인 수에즈 운하 도하 장면.

사다트는 화려한 모순이다. 그는 전쟁을 결행했다(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 그의 이집트 군대의 초반 기습은 극적 성공이다. 전쟁 중·후반은 이스라엘의 반격과 승리다. 종전 후 그는 평화를 쟁취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역사적 화해다. 전쟁과 평화의 관계는 미묘하다. 대립하면서 의존한다. 그는 두 개의 충돌하는 주제를 과감하게 접근, 성취했다. 10월 전쟁의 내막은 흥미롭다. 사다트의 ‘제한(制限)전쟁’론은 독특하다. 이스라엘의 핵무기 검토 이야기는 긴박하다. 대통령 사다트는 암살당한다(81년). 그의 삶은 지도력의 결정적 순간으로 구성됐다.
 
카이로는 어두운 모순이다. 도시 외곽의 기자 피라미드는 압도적이고 장엄하다. 이집트 수도의 현재는 낡고 혼잡하다. 가장 오랜 문명국의 잔인한 쇠락이다. 나는 ‘10월 전쟁 파노라마’ 박물관을 찾았다. 이슬람 양식의 원통형 건물. 노획한 이스라엘군의 미국제 전차 M48이 있다. 이스라엘 전투기의 잔해에 6각형 다윗의 별이 보인다.
 
이집트군의 수에즈 운하 도하. 물대포로 이스라엘군 모래 장벽을 허물고 있다(애니메이션).

이집트군의 수에즈 운하 도하. 물대포로 이스라엘군 모래 장벽을 허물고 있다(애니메이션).

10월 전쟁 6년 전, 1967년 ‘6일 전쟁’은 이집트의 치욕적 참패다. 공군은 궤멸됐다. 시나이 반도는 이스라엘에 빼앗겼다. 70년 9월 대통령 나세르가 죽는다. 부통령 사다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의 책무는 영토 회복과 자존심 복원. 미국·소련의 냉전시대다. 그는 외교·군사의 지형을 바꿔 나갔다. 핵심은 중동 분쟁에 미국을 불러들이는 것.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외면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후원국이다. 사다트의 고뇌는 깊어졌다. 그는 “우리가 현상 타파를 위한 군사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미국이 움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사다트 회고록』 1978년)
 
사다트 대통령은 전쟁을 결심했다. 박물관 전시물의 한 구절이 강렬하다. “영광스러운 평화를 위한 전쟁.”-. 함께갔던 카이로대학의 젊은 강사 아무르 하산이 말했다. “이스라엘과의 적대적 게임에서 1대1의 대등한 전략적 균형이 이루어져야 미국은 개입한다. 그것이 굴욕적 평화를 영광스럽게 바꾸는 조건이었다.” 사다트는 전쟁 방식을 재구성했다. 제한 전쟁(limited war) 개념의 도입이다. 시나이 반도의 전체 탈환이 아니다.
 
‘6일 전쟁’의 패배는 공군과 기갑부대의 기량 부족 때문이었다. 전술 변경은 혁신적이었다. 전차 대(對) 전차, 전투기 대 전투기로 맞붙는 구도를 깼다. 미사일로 대치했다.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AT-3 새거), 로켓포(RPG-7V), 신형 지대공 미사일(SA-6)로 무장했다. 철수했던 소련 군사고문단이 다시 왔다. 공격 시점은 10월 6일 토요일. 그날은 ‘욤키푸르’(YomKippur), 유대인의 속죄일이다. 이스라엘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오후 2시 기습 공격이 시작됐다. 시리아군도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욤키푸르 전쟁의 개막이다.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 협상 중 워싱턴 근처 게티즈버그 남북전쟁 공원을 방문한 사다트 대통령, 카터 미국 대통령, 이스라엘 베긴 총리, 다얀 외무장관(전쟁 때 국방장관) (왼쪽부터). [중앙포토]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 협상 중 워싱턴 근처 게티즈버그 남북전쟁 공원을 방문한 사다트 대통령, 카터 미국 대통령, 이스라엘 베긴 총리, 다얀 외무장관(전쟁 때 국방장관) (왼쪽부터). [중앙포토]

이집트의 핵심 작전은 수에즈 운하(너비 100~ 200m)의 도하(渡河)다. 목표물은 운하 건너편의 바 레브(Bar Lev)라인. 이스라엘군이 쌓은 15~20m 모래 장벽이다. 10만 발의 포격과 전투기 200여 대로 급습했다. 알사카 특수부대원 8000명이 고무보트(한 척당 7명 승선)에 올랐다. 그들은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시다)를 외치며 노를 저었다. 박물관에 알사카의 고무보트 조각상이 있다. 설욕전의 투지가 뿜어난다.
 
파노라마 극장에서 ‘위대한 도하’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된다. 작전 성공 여부는 모래 장벽 허물기. 폭탄과 대형 불도저는 더뎠다. 물대포가 혁신적 해법이었다. 고압 펌프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최단 2시간 만에 모래벽을 뚫었다. 이집트군 8만 명이 운하를 넘었다. 이스라엘 전투기 50여 대가 지대공 미사일에 당했다. 이스라엘 전차 250여 대가 미사일을 맞았다.
 
수에즈 운하 기습은 경이적이었다. 시리아군도 골란고원 깊숙이 진입했다. 골다 메이어 총리의 이스라엘 지도부는 충격을 받았다. 군 정보기관 아만(Aman)의 판단은 빗나갔다. 그것은 오만과 오판 때문이다. 이집트의 공격 징후는 여러 군데에서 포착됐다. 하지만 아만은 사다트의 전쟁결의를 평가절하했다. 정보 실패로 메이어는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군사 열병식 현장의 사다트와 무바라크, 잠시 후 사다트는 피살된다. [중앙포토]

군사 열병식 현장의 사다트와 무바라크, 잠시 후 사다트는 피살된다. [중앙포토]

전쟁 둘째 날 메이어 총리 관저. 수뇌부 회의에서 핵무기 사용 문제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국방장관 모세 다얀은 ‘이스라엘 제3왕국(Third Temple)의 파멸’을 거론했다. 다얀은 ‘6일 전쟁’의 영웅이다. 하지만 그는 낙담과 비관을 섞었다. 눈길 끄는 그 내용은 미국 CNA(해군 분석센터 2013년)의 연구서에 담겼다. 발제자는 에브너 코언 박사. 내용은 이렇다. “다얀=전황이 심각하다. 핵 옵션을 준비해야 한다, 갈릴리 장관=공포심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메이어=그런 방안은 잊어버려라, 다얀=총리의 생각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겠다.” 이 내용은 진실일까.
 
이스라엘은 핵 보유국이다. 하지만 그 주제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는 묵살과 은폐다. 그 때문에 다얀의 진실은 미스터리다. 양욱 수석연구위원(국방안보포럼)은 “다얀의 핵 옵션은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한 고도의 압박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다트의 제한전쟁도 핵 보복을 의식했기 때문일 수 있다”고 했다. 명백한 대목은 있다. 핵이 없는 이집트가 핵 보유국(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다. 그것은 여러 시사점을 제공한다. 핵 무장국 북한의 도발 가능성은 상식이다. 한국의 응징은 어느 수준일까. 핵이 없는 나라는 수세적이고 눈치를 본다.
 
1973년 10월, 중동

1973년 10월, 중동

이스라엘의 역량이 되살아났다. 10월 25일, 전쟁의 막은 내렸다. 이스라엘은 역전승했다. 하지만 불패 신화는 해체됐다. 이집트 군대의 이미지는 용감한 진격으로 바뀌었다. 자존심은 회복됐다. 사다트의 제한전쟁 목표는 이루어졌다. 중동 질서가 역동적으로 재조정되기 시작했다. 키신저의 셔틀 외교가 가동됐다.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금수 조치가 이어졌다.
 
사다트는 평화 구축에 나섰다. 그는 77년 11월 이스라엘에 갔다. 78년 9월 사다트는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카터 대통령 중재, 캠프 데이비드 협상). 리비아·시리아는 그를 아랍의 배신자로 규탄했다. 사다트의 피살은 과격파 원리주의자의 소행이다. 죽음 후 그의 비원(悲願)이 완성됐다. 시나이반도가 이집트로 완전히 반환됐다(1982년 4월). 사다트의 성취는 모순과 역설의 드라마다.
 
 
사다트의 전격 이스라엘 방문…평화를 만들 때도 용감했다 
 
카이로 외곽에 있는 무명용사 기념비. 전통적인 피라미드 형상(높이 37m)이다. 그 안에 사다트 묘소도 있다.

카이로 외곽에 있는 무명용사 기념비. 전통적인 피라미드 형상(높이 37m)이다. 그 안에 사다트 묘소도 있다.

안와르 사다트(1918~81)의 리더십 매력은 용기다. 그의 삶의 절정은 10월 전쟁이다. 그는 절정의 주제를 평화로 바꿨다. 그런 전환은 용기와 신념으로 가능하다. 전직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렇게 회고(2000년 미국 메릴랜드대학 연설)했다. “사다트는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거의 예언자적(prophetic) 비전을 가졌다. 그는 유연했지만 거칠었다.”
 
카이로의 외곽 나스르 시에 이집트군 무명용사 기념비가 있다. 피라미드 형상이다. 그 안에 사다트 묘지가 있다. 그는 81년 10월 전쟁 8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 현장에서 피살됐다. 사다트의 묘비명은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과 평화의 영웅, 그는 평화를 위해 삶을 바쳤고 원칙을 위해 순교했다.” 그곳에서 만난 70대 전직 장교는 “사다트 대통령은 전쟁을 결행할 때 과감했고 평화에 나설 때도 용감했다”고 기억했다. 전쟁을 결심하는 지도자는 역사를 만든다.
 
골다 메이어

골다 메이어

사다트는 1952년 ‘자유 장교단’의 군사혁명에 참가했다. 혁명의 성공 주연은 가말 나세르(1918~70). 나세르 시대는 아랍민족주의를 분출시켰다. 그 시대의 역동성은 박정희·김종필에게 5·16의 상상력을 주었다. 나세르는 심장마비로 숨진다. 권력의 행운은 부통령 사다트에게 돌아갔다. 그의 평판은 무해(無害)·평범한 조연자였다. 사다트는 내면의 권력 의지를 연마했다. 71년 5월 반(反)사다트·친(親)소련파 각료들이 집단 사표를 냈다. 그들은 정권 붕괴를 노렸다. 사다트는 즉각 역습을 가했다. 집단 사표 수리→뉴스 방송→사표 제출자 가택연금→후임자 임명이다. 그것은 전광석화(電光石火)의 권력평정이었다.
 
사다트의 77년 11월 이스라엘 방문은 예측 파괴다. 그는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전직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사진)을 만났다. 메이어는 10월 전쟁 때 적대국의 총리. 두 사람의 파안대소는 강렬했다. 전쟁과 평화 사이는 극적으로 교류한다.
 
카이로(이집트)=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S BOX] 카이로의 북한 흔적들
북한 화가가 그린 사다트 초상화. 그 옆은 박보균 대기자.

북한 화가가 그린 사다트 초상화. 그 옆은 박보균 대기자.

카이로의 ‘10월 전쟁 파노라마’와 시타델의 군사박물관에는 북한 냄새가 풍긴다. 상당수 벽화와 초상화들이 북한 화가의 작품이다. 사다트의 초상화 아래에 ‘DPR, KOREA 1993.1 황걸’이라고 적혀 있다. 건립과 개축에 북한의 지원이 있었다. 무명용사 기념비 옆에 세워진 10월 전쟁 기념화도 북한 화가가 그렸다. 북한 화풍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세밀하지만 단조롭다. 아무르 하산은 “사진 같은 화풍은 이집트의 장엄하고 상상력 풍부한 예술 전통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무바라크 30년 독재의 유산”이라고 했다.
 
10월 전쟁 때 무바라크는 공군사령관이다 북한은 공군 조종사 20여 명을 파견했다. 사다트 사후 부통령 무바라크는 권력을 장악한다. 그 이후 무바라크와 북한 주석 김일성의 밀월시대가 열렸다. 무바라크는 북한에 스커드 미사일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평양에서 장기집권의 노하우를 습득했다. 하지만 지금의 엘시시 대통령 시대는 다르다. 이집트는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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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