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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군용’이 ‘사제’를 능가하는 나라를 위하여

이상언 사회2부장

이상언 사회2부장

영국의 공사장이나 골프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파란색 비옷이 있다. 얇은 한 겹 천의 바지와 상의가 따로 있는 형태인데, 바지도 입은 옷 위에 그대로 입을 수 있도록 풍성하게 디자인돼 있다. 방수 기능과 통기성을 동시에 갖춘 ‘고어텍스’로 만들어진 게 인기 비결이다. 영국에서 ‘국민 비옷’처럼 된 이 옷은 영국 공군의 군용품이다. 인터넷 시장에서 새것 수준의 중고가 상·하의 한 벌에 7만∼8만원에 거래되는 점으로 미뤄 볼 때 군납가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고어텍스로 만든 옷은 요즘 한국에서 뒷산 등산객도 흔히 입지만 원가 자체가 비싼 최상품에 속한다. 아무튼 영국 군인은 최고급 비옷을 입는다.
 

강군을 보유한 국가에서는 군인 보호가 최우선
우리 군에 전문 외상센터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

우리가 흔히 ‘버버리’라고 부르는 트렌치(참호) 코트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원래 군용이었다. 비와 습기를 막으면서 보온력도 높은 개버딘이라는 천을 만든 영국 회사가 버버리다. 이 옷에는 군인 보호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수년 전 러시아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감기 기운이 있어 가이드 역할을 하던 현지인과 함께 약국에 갔다. 약사가 일반 제약사 약을 살 거냐, 군에서 나온 약을 살 거냐고 물었다. 군에서 나온 해열제가 조금 더 비싼데 약효는 더 좋다고 했다. 그러더니 지사제, 벌레 물린 데 바르는 연고 등 여행객이 필요로 할 만한 것들을 함께 꺼내놓았다. 러시아어를 읽을 수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포장에 브랜드 문양이 없고 글씨만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군용이 맞는 듯했다. 가이드가 “나도 군에서 나온 약을 많이 쓴다. 군용은 함량을 속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에서 목격한, ‘군용’은 ‘사제(私製)’만 못하다는 상식을 깨는 사례들이다. 우리 기성세대는 군용 건빵에 든 별사탕과 군납 담배에 장정들 ‘딴생각’ 덜하게 하는 물질을 넣었다고 의심하며 자랐다. 원래 군복은 여름에는 덥게, 겨울에는 춥게 돼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파는 미군 물품은 고급이라 여겼지만, 국군 물품은 거저 준다 해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요즘 군용품이 놀랄 정도로 좋아지긴 했다. 부대 내 상점(PX)에서 파는 셔츠나 방한용품은 민간인 사이에서도 인기다. ‘평생 무좀’의 원흉이었던 전투화는 예전 것에 비해 가볍고 편한 형태로 바뀌었다. ‘달팽이 크림’으로 알려진 PX 화장품은 품귀현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군인들이 쓰는 물건의 품질이 좋아 민간인도 탐내는 것, 늦었지만 바람직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군도 꽤 ‘선진화’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믿음이 한 방에 깨졌다. 판문점에서 벌어진 북한 귀순 병사 총격 사건이 계기다. 이 일로 인해 우리 군에는 밤에도 날 수 있는 의료 전문 후송 헬기가 없으며, 장병이 총상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군 병원에서 해결하기 힘들어 민간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는 부끄러운 현실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동안 여러 차례 군 병원에 외상센터를 만들겠다는 계획이 발표됐지만 차일피일 미뤄지다 최근에야 설계작업을 시작했다는 것도 이 사건으로 드러나게 됐다.
 
군과 의료계는 경기도 성남시 국군 수도병원에 외상센터가 들어선다 해도 우수한 의료진을 갖추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는 기우일 수도 있다. 경력에 맞는 처우를 보장하고, 전문성을 기르며 인정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면 의사들이 손들고 나설지도 모른다. 휴전 상태인 국가에서, 모든 남성이 병역의무를 지는 나라에서 군인의 목숨을 지키는 일만큼 숭고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에 쓰는 세금을 누가 아깝다고 할 것인가.
 
요즘 국회에서는 북한 병사 기생충 논란이 뜨겁다. 그 바람에 우리 장병 후송·치료 문제는 또 뒷전으로 밀려났다. 영화 ‘남한산성’이 떠오른다. 윗분들이 정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성을 지키다 동상에 걸린 장졸들이 덮고 있던 가마니마저 빼앗기고 부어오른 손발에 돼지기름을 바르던 그 장면 말이다.
 
이상언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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