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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환자 존엄사 결정권, 가족에도 확대해야

허대석 서울대병원 내과 교수

허대석 서울대병원 내과 교수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시범사업이 지난달부터 10개 의료기관에서 시작됐다. 임종 과정의 환자가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 등 단지 생명 연장만을 위한 연명 의료를 거부하는 수단이다. 내년 2월 4일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을 앞두고 우선 시험해 보자는 취지다. 이 법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데도 환자가 고통받는 기간만 연장하는 연명 의료가 무의미하다는 사회적 인식을 반영했다.
 

존엄사 법적 인정 환영하지만
‘환자 본인 서명’ 집착하는 건
의료 현실 무시하는 요식행위
말기 환자의 관리 더 어려워져

이 법은 제한된 조건에서의 존엄사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즉 생명 경시를 우려해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고, 산소나 영양 공급 등 필수 의료행위는 중단할 수 없게 돼 있다. 또 회생 가능성이 적다고 해도 지속적 식물 상태의 환자는 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제한은 많지만, 그래도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가 중환자실에서 복잡한 기계장치에 의존해 연명하다 고통스럽게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연명의료결정법의 시행을 환영한다.
 
이 법의 적용을 받으려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를 내야 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환자를 포함해 19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국가에서 인정하는 등록기관에 가서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 작성해 등록해 놓으면 연명의료계획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연명의료계획서는 의료기관에 입원한 환자와 의사가 함께 작성하는 서류다. 담당의와 관련 분야 전문의가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진단한 환자는 의사로부터 연명 의료와 호스피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들은 후 연명 의료를 시행할 것인지 여부를 연명의료계획서를 통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처럼 이미 연명 의료가 시행되는 경우에도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의료진이 판단하면, 법적 분쟁 없이 가족 2인의 일관된 진술을 근거로 인공호흡기의 중단 및 제거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연명 의료 결정 시범사업이 실시된 뒤 의료 현장에서는 말기 환자에게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현실이다. 연명의료계획서 등 모든 서식에 환자 본인의 자필 서명만 유효하다는 시행규칙을 의료 현장에서 실제로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성질환을 앓다가 급속히 악화하기 시작하는 말기는 임종 전 두세 달 전이고, 이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본인이 작성하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말기 환자가 법에 명시된 대로 의사의 설명을 듣고 자신의 연명 의료 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실제 매우 드문 일이다.
 
시론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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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환자가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의사로부터 들으면,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할지 모른다는 등의 이유로, 의료진이 환자에게 말기임을 설명하는 것을 가족이 막는 경우가 80~90%에 이르기 때문이다. 가족의 허락을 받지 않고 환자에게 직접 불치병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의료진을 폭행하는 일이 있을 정도로 환자 가족은 이 문제에 매우 예민하다.
 
의사가 환자와 대화하도록 어렵사리 허용받은 경우에도 말기 환자의 절반은 자기 죽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아예 이야기하기를 거부하거나 회피한다. 이런 이유로 그동안 우리나라 의료기관에서 널리 사용돼 온 ‘심폐소생술 하지 않기(DNR) 동의서’ 양식에 환자 본인이 서명한 경우는 1%도 안 되고, 대부분 가족이 대리 서명해 왔다. 새로 제정된 연명의료결정법 서식에 반드시 본인 서명이 들어가야 법적으로 유효하도록 한 것은 의료 현실과 맞지 않는다. 미국도 1990년 본인 서명을 의무화하는 ‘환자자기결정법’을 실시해 20여 년이 지났으나, 본인 작성 비율이 30%를 넘기지 못하자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에 가족들의 대리 결정을 인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유럽·대만·일본도 비슷한 길을 밟았다.
 
환자의 자기 결정권은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서식이 ‘환자 본인의 서명’이라는 요식에 집착하다 보니 말기 환자의 호스피스 활용도 더 어려워졌다. 환자 본인이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연명 의료를 결정해야 하는 경우, 의료진은 불필요한 연명 의료인 줄 알면서도 책임을 피하려고 방어적 연명 진료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피해는 환자와 그 가족들, 의료진이 감수해야 한다.
 
말기 질환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는 환자에게 “곧 죽을 것이니 연명의료계획서에 서명하라”고 말하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정서이다. 말기 환자가 건강한 사람과 똑같은 조건에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다른 선진국처럼 의료진과 가족이 상의해 연명 의료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내과 교수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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