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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막으려 만든 ‘고용공시제’가 일자리 줄인다

전기·전자 업종의 A사에는 6000명 정도의 ‘소속 외 근로자’가 근무한다. A사 소속이 아니라 협력업체이거나 전문업체 정규직이다. A사의 제품 생산에 필요한 장치를 관리하거나 돕는 인력이 많다. 이 회사엔 기간제 근로자도 100명가량 근무한다.
 

내년부터 비정규직 숫자·업무 공개
3000명 넘는 곳 대상 … 세계 유례없어
“경영 간섭에 여론재판 조장 우려”
일부 기업들 청년인턴 채용 취소도

2년 전부터 시행 중인 고용형태공시제에 따라 300인 이상 고용한 회사는 A사처럼 정규직과 기간제, 소속 외 근로자를 구분해 매년 숫자를 공개하고 있다. 다만 이들이 하는 업무는 공표되지 않는다.
 
내년부터는 달라진다. 협력업체나 파견업체, 전문업체 소속 정규직이지만 다른 회사의 사업장에서 일한다면 그 업무까지 공개해야 한다. A사의 경우 협력업체 근로자가 기계설치 업무를 담당하는지, 시스템 조작일을 하는지를 낱낱이 공표해야 한다는 얘기다.
 
기간제와 소속외 근로자 비율

기간제와 소속외 근로자 비율

고용노동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고용정책기본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시행에 들어간다고 21일 밝혔다. 내년에는 3000인 이상 대기업에, 2019년에는 1000인 이상 대기업에 적용한다.
 
현재 법인 단위로 공개하던 공시 규모도 개별 사업장으로 좁혔다. 예컨대 B병원은 그동안 기간제나 소속 외 근로자를 공표하지 않았다. 공익재단인 사회복지법인 산하여서 법인에서 일괄적으로 합산해 공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법인 산하 전국의 모든 병원이 개별적으로 비정규직 규모와 하는 일을 공개해야 한다.
 
박성희 고용부 노동시장정책관은 “사업주의 인식 개선과 자율적인 고용개선을 유도하는 기능을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사실상 여론 압박을 통해 정규직 전환을 늘리고 고용시장도 활성화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애초 이 방안은 지난 정부에서 야당과 노동계의 요구에 따라 추진을 검토했으나 전 세계에 유례 없는 초법적 규제라는 반발이 일자 유보했다. 고용형태공시제를 시행하는 국가도 한국이 유일하다. 당시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협력업체 근로자가 하는 업무까지 낱낱이 공개토록 하는 것은 기업의 인력운용에 국가가 간섭하고, 여론재판을 조장한다”고 반발했다.
 
실제 모 제조업체는 외국산이나 특수설비를 관리하고 안정화하는 업무에 장비업체 근로자를 투입한다. 외국 회사의 전문가도 상주한다. 장비를 만든 업체 근로자의 전문성과 유사시 대처능력을 고려한 결정이다.
 
기계를 판매한 회사로선 당연한 서비스 제공이다. 그런데 내년부터 바뀐 고용형태공시제가 시행되면 ‘소속 외 근로자’란 항목으로 이들의 숫자는 물론 업무까지 알려야 한다. 얼핏 숫자만 보면 장비를 들여올 때마다 이른바 ‘간접고용’ 규모가 확 늘어난다.
 
더욱이 그들이 하는 일은 상시·지속적인 업무에 속한다. 이런 업무에 협력업체 근로자를 차용해 일을 시키는 것처럼 비치게 된다. 회사로선 억울하지만 비정규직을 쓰지 말아야 할 곳에 비정규직을 고용한 기업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더 심각한 건 회사의 인력운용 상황이 공개됨에 따라 회사의 경영전략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제품의 특성상 장비 관리나 시스템 조작 인원만 봐도 공정을 추정할 수 있다”며 “인력운용 전략이 경쟁력의 큰 요소인데 이를 공개하라니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고용형태공시제는 채용시장에서도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대기업 계열사인 C사는 고용형태공시제가 시행되자 청년인턴을 뽑지 않는다. 이들을 기간제 근로자로 분류해 공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뜻에서 시작한 청년인턴이 엉뚱하게 비정규직을 많이 쓰는 회사로 낙인 찍는 역효과를 내는 꼴이다. 이런 여론 재판에 휘말리기 싫어 아예 인턴시장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기간제 근로자=회사가 근무 기간을 정하고 채용한 비정규직 근로자
◆소속 외 근로자=협력업체나 파견업체 등의 정규직이지만 다른 회사(대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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