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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칼럼] 100주년 박정희의 신미양요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정희 시대는 아득하다. 하지만 역사적 기억은 선명하다. 그의 18년 집권 세월은 격렬했다. 그만큼 명암도 뚜렷하다. 밝음은 산업화의 장엄한 성취다. 어둠은 유신 독재의 고통이다.
 

조선말 미군 침공 강화도 찾아
무명 군졸의 무덤에 분향했다
“주한미군, 철수하려면 하라”
강대국 향한 자주 안보의 시위
당당함의 전략적 관리는
2017년 한·중 관계에도 유효

‘박정희 탄생 100주년’(11월 14일)이다. 그 시절 사연들이 밀물처럼 스며든다. 하나의 장면이 고개를 든다. 1977년 가을 그의 강화도 방문이다. 그는 바닷가 용두돈대에서 ‘강화전적지 정화(淨化)기념비’를 세웠다. 이어서 조선 말 신미양요의 무명용사 무덤을 찾았다. 신미양요는 1871년 미 해군 아시아함대 5척의 강화도 침공이다. 신문은 이렇게 기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미양요 때 전사한 장병들이 묻혀 있는 ‘전망장병시랑 순절묘단(戰亡將兵侍郞 殉節墓壇)에 헌화·분향했다. 박 대통령은 ‘장군의 비각은 있으나 병사들의 순국비가 없는데 무명용사 순절비를 세우라’고 지시했다.”(중앙일보 1977년 10월 29일) 나는 그곳을 찾아갔다.
 
신미 순의총(殉義塚).- 안내문이 있다. “광성보 전투 전사자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51인은 7기(基)의 분묘에 합장하였다.” 그 사연은 상념에 젖게 한다. 40년 전 박정희는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을까. 조선의 비천하고 이름 없는 병사의 원혼(冤魂)을 왜 달랬을까. 박정희 이후 어느 대통령도 여기를 찾은 적이 없다. 그가 연출한 풍광은 명쾌하다. 자주국방의 투지를 표출한 것이다. 그것은 미국을 향한 시위였다.
 
그 시절 미국과의 관계는 불화와 갈등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짰다. 카터는 박정희를 압박했다. 유신의 인권 억압과 박동선 사건이 얽혔다. 70년대 초부터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재구성됐다. 박정희는 그런 재편 작업을 불신했다. 그 출발은 ‘닉슨 독트린’이다. 1973년 1월 미국과 월맹(북베트남)의 파리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협상의 주역은 키신저다. 그해 11월 국무장관 키신저는 한국에 왔다. 박정희는 그를 만났다. 청와대 면담에 김종필(JP) 총리가 있었다.
 
박보균칼럼

박보균칼럼

JP는 이렇게 기억한다. “키신저는 득의만면했다. 박 대통령의 표정은 냉정했다. ‘파리협정이 잘된 거라고 생각하는가. 큰일 났다. 월남(남베트남)의 티우 정권은 끝났구먼.’ 그 직설에 키신저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긴장감이 흘렀다. 키신저는 ‘평화공존이 시작됐다’고 반박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미군 철수 뒤 월맹은 침공에 나설 거다. 월남군이 못 막는다’고 했다. 역사 전개를 봐라. 박 대통령이 옳았다.” 1975년 4월 월남은 패망한다. 베트남의 공산 통일이다. 키신저의 평화는 세력 균형이다. 지금도 그는 전략카드를 내놓는다. 북핵 해결을 위한 미·중 빅딜이다.
 
박정희는 그 무렵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 독자노선은 대담하다. 그것은 미국에겐 충격적인 도전이다. 미국은 핵 포기를 종용했다. 강대국 압박은 은근하면서 거칠다. 그 시점이다. 신미양요는 박정희의 역사적 상상력을 분출시켰다. 그는 밀물로 거세진 바다를 내려다봤다. 비감이 어린다. 그는 “천혜의 요새”라고 했다. 조선군이 낡은 대포를 쏘아댄 곳. 박정희의 말에 비장함이 서려 있다. 그의 글씨로 세운 전적비 뒷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호국의 기상을 이어받는 곳.” 그 글귀 속에 그의 외침이 담겼다. “주한미군, 떠나려면 떠나라.”
 
박정희는 그렇게 안보 의지를 단련했다. 위기는 기회다. 그는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을 묶었다. 한국의 산업화는 도약했다.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의 강대국 다루기는 절제와 배짱의 배합이다. 그는 국력의 한계선을 넘지 않았다. 박정희는 핵무기를 포기했다.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버렸다. “그 시대 월남은 미국에 의존하면서 자신을 잃고 망했다. 미국은 허약한 나라에선 철수했으나 스스로를 돕는 당당한 나라에선 철수하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을 활용해 자신을 키웠다.” 이 말은 JP의 ‘100주년’ 감회다.
 
2017년 문재인 정권의 대외정책은 균형외교다. 그것은 미국· 중국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수단은 한·미 동맹 강화와 3불(不)정책이다. 3불의 첫째는 사드의 추가배치 검토 불가다. 한·중 사드 논란이 ‘봉인’됐다고 했다. 하지만 문재인·시진핑의 정상회담(11일)은 달랐다. 시진핑 주석은 사드 배치 반대를 되풀이했다.
 
‘3불’은 외교 구애다. 하지만 그것은 대외정책의 허약과 조급함으로 비춰진다. 강대국은 의연함을 놓친 상대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중화(中華)의 전통적 방식이다. 외교의 당당함은 역사의 감수성을 요구한다. 현실적 요건은 한·미 동맹이다. 동맹이 약해지면 중국은 한국을 무시한다. 중국과 친해야 한다. 하지만 당당함의 전략적 관리는 필수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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