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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체취 물씬한 만물상, 문화유산답사기 익어간다

[정재숙의 공간탐색] 미술사가 유홍준의 연구실
창작의 산실은 내밀한 처소다. 한국 문화계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작업하는지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했다.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그 생산 현장을 깊게 드러내려 사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화가인 안충기 기자는 짧은 시간 재빠른 스케치로 작가들의 아지트 풍경을 압축했다.
 
이 연재물의 열여섯 번째 주인공은 미술사가 유홍준(68)이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쓰는 데 선수이자, 글발 말발이 1등급인 그는 그렇게 갈고닦은 공부와 안목을 이 시대 사람들과 나눠 쓰는 일에 열심이다.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을 내건 그의 문화유산 답사는 오늘도 쉬지 않는다.  

유홍준 교수가 평생 모아온 책과 자료, 유물과 기념품이 빼곡히 들어찬 명지대 한국미술사연구소는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자 시대의 만물상이며 미술사 연구자들의 사랑방이다. 안충기 기자·화가

유홍준 교수가 평생 모아온 책과 자료, 유물과 기념품이 빼곡히 들어찬 명지대 한국미술사연구소는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자 시대의 만물상이며 미술사 연구자들의 사랑방이다. 안충기 기자·화가

 
나무로 조각한 액막이 북어 한 마리가 대롱대롱 손님을 맞는다. 천장에 매달린 극락조 한 쌍은 날아오를 듯 발을 찬다. 사방을 둘러친 서가는 책으로 가득 찼는데 그 틈새 또한 빈 곳이 없다. 눈길 돌리는 곳마다 아기자기 올망졸망 골동(骨董)이 늘어섰다. 서울 거북골로 명지대 행정관 4층, 유홍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의 연구실은 사람 체취 물씬한 만물상이다. ‘명지대 한국미술사연구소’와 ‘수졸당 문고’ 문패를 각기 단 널찍한 방 두 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교수 연구실이라 자부한다”는 그의 말을 실감케 했다. 책 3만여 권을 비롯해 유물과 도록, 서화와 지도, 슬라이드와 자료가 벽장마다 그득하다.
 
“문화유산의 품격과 예술의 향기가 깃든 사랑방이랄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해서 갖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한 장인의 기념품을 하나둘 곁에 두다 보니 저절로 박물관이 됐어요. 내 시선과 손때 묻은 애장품은 나를 찾아오는 학생과 손님 또한 즐겁게 하니 제 값어치를 충분히 한 셈이죠.”
 
한쪽 선반에는 달항아리들이 나란하고, 다른 서가 위 벽면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전지(詩箋紙)에 쓴 글씨가 늘어섰다. 제자가 빚은 조각상, 중국 박물관 아트숍에서 산 청동 두꺼비, 낙관이 없는 영모화, 경매에서 건진 실경산수화, 개성 넘치는 질그릇 등이 방주인이 평생 걸어온 길을 보여 주고 있다.
 
“내 학문은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을 위하여’란 목표에 충실했어요. 보고 배운 걸 동시대 사람들과 나눠 쓰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죠. 제가 대표작이자 인생의 책으로 꼽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25년 14권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출판계에서 인문교양서 최초로 밀리언셀러 기록을 세운 이유가 이것 아닐까요. 옛 친구 같은 독자를 이끌어 주는 친절함으로 대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한 권 한 권 진화했기에 필생의 작업이 된 겁니다. 높은 질의 기행문학·미술평론을 대중과 함께하겠다는 내 마음이 장수의 비결이겠죠.”
 
지난 9월 서울 편 두 권을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서울 편 제3권을 준비 중이다. 일본 편에 이은 중국 편도 무르익고 있다. 1년이면 서너 번씩 여행하는 중국은 그에게 10년 넘게 드나든 ‘드넓은 놀이터’다. 2019년 상하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맞춰 중국 편 제1권을 낼 예정이라고 했다. 절판된 『화인열전』도 발굴된 새 자료를 보충해 다시 쓰는 작업에 들어갔다. 12월 2일 한국미술사학회에서는 표암 강세황을 화가로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한다.
 
“영원한 학생이 납니다. 요새도 공부 모임이 넷이에요. 『사기』를 읽는 ‘고전 강독회’, 당시(唐詩)를 배우는 ‘이목회’, 초서를 공부하는 ‘말일파초회’에 중국어 수업까지 듣습니다. 그 사이사이에 강연하고 답사 가고 자료 보고 강의하니 머리가 몇 동강이 나는 꼴이죠. 오죽하면 제일 무서운 말이 ‘편할 때 밥 한 끼 먹자’는 친구들 얘기겠어요.”
 
그렇게 바쁜 그이지만 주말 이틀은 충남 부여군 반교리에 지은 ‘휴휴당(休休堂)’에서 자연을 벗 삼아 지내려 애쓴다. 10여 년 전부터 ‘5도(都) 2촌(村)’을 실천하려 제2의 고향으로 삼은 부여에서 백제의 향기를 맡으며 정신을 충전한다. “백제라는 문화적 DNA, 향토적 DNA를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문화적 과제 중 하나”라 여기는 그는 지난해부터 부여문화원에 자신이 수집해 온 책과 유물을 차례로 기증하고 있다.
 
“제가 책 욕심이 많아요. 친구들이 ‘공수레 만수거’라 부를 정도죠. 외국 나갈 때 튼튼한 빈 가방을 들고 나갔다가 책으로 가득 채워 온다고 해서 붙은 호칭입니다. 책 한 권 쓸 때마다 사들이는 자료가 또 수천 권이니 두루 볼 수 있는 곳으로 보낼 작정입니다. 오래 즐겼으니까 이제는 나눠야죠.”
 
유 교수는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옹이 경주에서 그랬듯, 아이들 데리고 백제의 옛날을 되살리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고 했다. 흰 고무신을 신은 유홍준 할아버지가 부여의 ‘마지막 백제인’이 될 날이 기대된다.
 
 

 
‘면허보다 나은 무면허’ 부채 서화의 달인
유홍준 교수의 답사여행 버스에 올랐던 이들은 두 번 놀란다. 출발부터 도착까지 한시도 쉬지 않는 공부가 첫째다. 유 교수는 물론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답사 손님 중 객원 강사가 차례로 등장해 청산유수 인생학교를 개설한다. 곁들이는 음악 또한 수준급이라 왜 유 교수 별명이 ‘교육방송’인지 절로 이해된다.
 
강의 틈틈이 쉼 없이 손을 놀리는 유 교수의 부채 그림이 둘째다. 방구부채와 접부채 두 종류를 가방에 넉넉히 넣어뒀다가 만나는 이의 성격에 맞는 그림과 글을 순식간에 그려 선물한다. 솜씨가 꽤 좋아서 김정헌 화가는 “무면허가 면허보다 낫다”고 추어준다. 그는 “이제껏 나눠준 부채가 줄잡아 1000개는 넘지 싶다”고 했다.
 
부채는 그의 수첩이자 메모장이기도 하다. 길을 가다가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부채를 꺼내 달필로 적어 내려간다. 그가 쓰는 필기구는 붓펜이다. 서울 인사동 필방에서는 이 물건을 아예 ‘문화재청장표 붓펜’이라 부른다. 유 교수가 문화재청장 시절 많이 사가서 붙은 이름인데 원조는 임옥상 화가로 알려져 있다.

 
유홍준  
1949년 서울생.
 
93년 제1권 ‘남도답사 일번지’를 펴내며 시작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 글장정이 25년을 맞은 한국 출판계의 대표 저자이자 대중 인문학자.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구호를 인구에 회자시키며 우리 문화재의 재발견을 이끈 격조와 흥의 이야기꾼이다.
 서울대 미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를 나와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가로 활동하며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지냈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로 일한다. 저서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완당평전』 『안목』 등이 있다.  
 2003년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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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