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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레닌의 혁명열차 "역사는 미적거린 혁명가를 용서하지 않는다"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1917년 레닌 망명지에서 귀환하다 
 
레닌

레닌

레닌은 혁명의 서사시다. 레닌은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이다. 그것은 20세기 역사에서 압도적인 드라마다. 그 속에 격렬함과 격정이 혼재한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레닌의 혁명열차다. 그해 4월 망명지에서의 귀국이다. 봉인(封印)열차가 등장한다. 8일간 3200㎞의 오디세이다. 나는 레닌의 열차 귀환을 나눠서 추적했다.
 
1917년 4월 9일(당시 러시아 율리시스력 3월 28일). 스위스의 취리히 중앙역은 긴장감이 흘렀다. 레닌과 망명자들의 집단 출현 때문이다. 그의 일행 32명은 열차에 올랐다. 그중에 레닌의 부인과 연인, 보좌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폴란드 사회주의자 칼 라데크가 있었다. 나머지 다수도 볼셰비키. 여행 비용은 각자 부담. 오후 3시 혁명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했다. 그 전야는 이렇게 전개됐다.
 
스위스 취리히의 슈피겔가세 14번지. 레닌이 살았던 아파트에 기념판이 붙어 있다. “레닌은 1916년 2월 21일~1917년 4월 2일까지 살았다.” 1917년은 제1차 세계대전 3년째인 해다. 승전보는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식량 부족도 심각했다. 대규모 군중 시위가 결정타였다. 2월 혁명이 터졌다. 3월에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는 퇴위했다. 공화정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에 있는 293호 기관차. 1917년 세 차례 ‘혁명열차’로 가동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에 있는 293호 기관차. 1917년 세 차례 ‘혁명열차’로 가동했다.

레닌은 그해 1월 이렇게 낙심했다. “살아서 다가올 혁명의 결정적인 전투를 보지 못할 것 같다.” 그의 나이 47세. 한 달 뒤 사태가 반전했다. 투지가 살아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은 망명 생활의 청산이다. 그는 골몰했다. 터키로 통과, 비행기, 중립국 스웨덴 여권 위조. … 마땅치 않았다. 그는 적대국인 독일 통과의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레닌은 스위스 사회주의자 프리츠 플라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플라텐은 독일영사와 접촉했다. 레닌은 로드맵을 짰다. 스위스→독일→스웨덴→핀란드를 거치는 대장정이다.
 
독일 군부와 외무부는 레닌을 주목했다. 그는 ‘전쟁을 부르주아의 음모’라고 비판했다. 독일은 그를 활용키로 했다. 그것은 “전쟁반대론자 레닌의 귀국…임시정부 혼란…러시아군의 동부전선 이탈…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하려는 계산이었다. 독일은 안전 통과를 보장했다. 치외 법권과 급행열차 제공이다. 레닌은 적국의 친절을 역이용했다. “레닌은 끝없는 논쟁(endless polemics)을 벌였지만… 이론에 사로잡히기보다 지금의 실제 사건에 집중했다.”(에드먼드 윌슨 『핀란드역으로』)
 
핀란드역 광장의 레닌 동상.

핀란드역 광장의 레닌 동상.

혁명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했다. 영국 BBC ‘마이클 포틸로의 유럽기차여행’은 이렇게 표현했다. “레닌의 여행은 열차 사상 가장 중대하고 긴박했다.” 일행은 독일 땅에 들어갔다. 망명객들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접경지 고트마딩겐역에서 열차를 바꿔 탔다.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그는 익숙한 가명, 레닌을 썼다. 독일은 ‘봉인열차(sealed train)’를 제공했다. 그 정체는 무엇인가. “그린 색 객차 한 량, 2등석 세 칸, 3등석 다섯 칸, 화장실 두 개. 출입문 4개 중 3개를 잠금.··· 독일군 장교가 통로에 분필로 선을 그었다. 객차 간 영토표시다.” (캐서린 메리데일 『열차 위 레닌』 2016년) 봉인의 낱말은 숨막힌다. 밀봉의 실상은 달랐다. 내 머릿속의 과장된 이미지는 허물어졌다.
 
레닌의 장갑차 이동. [중앙포토]

레닌의 장갑차 이동. [중앙포토]

레닌은 독일 첩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처칠의 표현은 러시아로 침투하는 병원균(bacillus)이다. 봉인은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레닌의 의도와 맞았다. 하지만 완전 봉인은 아니었다. 정차하면 맥주와 신문을 사오기도 했다. 레닌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체포의 불안감 때문이다. 베를린역에서 20시간 머물렀다. 레닌과 독일 관리의 접촉설이 돌았다.
 
4월 12일 자스니츠역에 도착했다. 적국을 종단한 봉인열차는 정지했다. 그곳은 발트해 항구. 나는 봉인 객차의 실물이 궁금했다. 역사의 기묘한 소품이기 때문이다. 그곳 출신 친구인 한스 실러가 아쉬움을 표한다. “동독 시절 1977년 러시아 혁명 60주년 때 이곳에 레닌 기념관이 세워졌고 봉인 객차도 전시됐다. 독일 통일 뒤 객차는 다른 데로 옮겨졌다.” 이젠 여객선이다. 스웨덴 트렐레보리 항구까지 4시간 뱃길. 거의가 배멀미를 했다. 레닌은 달랐다. 고참 혁명가 파벨 악셀로트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하루 24시간 혁명에 몰두하고… 잠잘 때도 혁명을 꿈꾼다.”(버트램 울프 『혁명을 만든 세 사람』) 그 집념 속으로 배멀미는 침입하지 못한다.
 
2017년 혁명 100주년 기념,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전시된 장갑차. [중앙포토]

2017년 혁명 100주년 기념,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전시된 장갑차. [중앙포토]

중립국 스웨덴의 분위기는 달랐다. 항구에서 말뫼로 이동했다. 사보이호텔에 스웨덴식 뷔페가 차려졌다. 일행은 걸신들린듯 음식을 해치웠다. 다음 여정은 스톡홀름. 시장과 좌파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이 영접을 나왔다. 레닌은 백화점에서 옷과 구두를 샀다. 그들은 17시간 북행 열차를 탔다. 레닌은 자신의 권력 의지를 점검했다. 순교자의 여정이 아니다. 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는 여정이다. 그는 "역사는 오늘 승리할 수 있을 때 미적거리는 혁명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식 ‘비르투’의 순간이다.
 
열차는 북쪽 하파란다에서 멈췄다. 마차 썰매를 탔다. 쌍둥이 마을인 핀란드의 토르니오역이다. 그 시절 핀란드는 러시아 자치령. 일행은 남행 열차에 올랐다.
 
나는 그 열차를 찾아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옛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 역무원은 친절했다. 기관차는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에 있다. 대형 유리관 안에서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동행한 무역상 이고르 예프세프(58)는 ‘혁명 100주년의 타임머신’이라고 했다. 그는 "293호 기관차는 1917년 세 차례 혁명열차로 작동했다. 레닌은 8월에 체포령을 피해 핀란드로 도피하고 10월 잠입 때 이 열차를 탔다. 4월에 탔던 기관차도 같은 기종”이라고 했다. 기념판이 붙어 있다. "1957년 핀란드 정부가 레닌의 여행을 기억하면서 기증한 선물.”
 
핀란드역에서 내리는 레닌을 볼셰비키 의장대가 도열해 환영하고 있다. 레닌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대다수 군중은 ‘레닌!’을 외쳤다.

핀란드역에서 내리는 레닌을 볼셰비키 의장대가 도열해 환영하고 있다. 레닌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대다수 군중은 ‘레닌!’을 외쳤다.

100년 전 4월 16일 밤 11시. 열차는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기적소리가 울렸다. 적색 투쟁을 알리는 굉음(轟音)이다. "열차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힐긋 보였다. 기관차는 불뱀(fiery snake)처럼 구불구불하게 다가섰다. … 10년 해외 생활 뒤 레닌은 열차에서 러시아 땅 위로 내려왔다.”(로버트 서비스 『레닌』) ‘불뱀’은 묵시(黙示)론적 예언이다. 구질서는 저주받고 파괴될 운명이다.
 
플랫폼은 군인, 노동자, 군중들로 차 있었다. 그들은 ‘레닌!’을 외쳤다.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군악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했다. 한쪽에서 ‘인터내셔널’노래도 불렀다. “우리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리라.”- 역 앞 장갑차에 레닌이 올랐다. 그의 외침은 거침없다. “약탈적인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이다. ···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 만세!” 장갑차가 이동했다. 깃발과 횃불이 뒤따랐다. 나는 핀란드역 앞 광장으로 갔다. 거대한 레닌 동상이 서 있다. 장갑차 포탑에서 포효하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레닌의 외침은 그곳 어디에 잔해로 남아 있는 듯하다.
 
1917년 레닌의 오디세이 8일간 3200㎞ 대장정

1917년 레닌의 오디세이 8일간 3200㎞ 대장정

레닌은 볼셰비키 본부(크세신스카야 저택)에서 ‘4월 테제’를 내놓았다. 내용은 급진적인 기습이다. 부르주아적 영향력(멘셰비키) 제거, 임시정부 타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즉각 결행. 레닌은 선명한 언어로 설득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격랑이 계속됐다. 10월 25일(당시 러시아 달력, 11월 7일) 혁명이 완성됐다. “레닌이 역사무대의 위대한 배우가 된 것은 역사가 제공한 예상 밖의 기회를 잡는 신속성과 정력(quickness & energy) 덕분이다.”(폴 존슨 『모던 타임스』)
 
공산주의 소련은 레닌의 작품이다. 하지만 혁명은 타락했다. 거사의 수혜자는 극소수다. 대중은 탄압받는다. 레닌주의는 증오와 선동, 공포와 음모의 정치학이다. 레닌의 후계자 스탈린은 그것을 악성 변질시켰다. 스탈린은 혁명열차에 탔던 지노비예프와 라데크를 숙청했다. 볼셰비즘은 ‘역사의 신(神)’에 대한 거친 도전이었다. 역사는 앙갚음을 한다. 10월 혁명 74년 뒤인 1991년 12월. 소련은 붕괴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자스니츠=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S BOX] 혁명과 사랑, 레닌 열차에 부인·연인 동승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레닌의 열차는 ‘혁명과 사랑’을 압축한다. 탑승자 중에 레닌의 부인과 연인이 있었다. 나데즈다 크룹스카야(1869~1939·사진 위쪽)와 이네사 아르망(1874~1920).
 
두 사람 모두 레닌의 혁명 동지. 레닌과 크룹스카야는 마르크스 노동운동을 함께했다. 둘의 1895년 결혼(레닌이 한 살 적음) 장소는 레닌의 시베리아(슈셴스코) 유형지. 그해 크룹스카야도 다른 곳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레닌을 찾아간 것이다. 그는 평생 남편을 뒷받침했다. 이네사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출신이다.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네사 아르망

이네사 아르망

그 후 이네사는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배웠다. 1910년에 망명객 레닌을 파리에서 만났다. 이네사는 외국어에 능숙했다. 레닌의 저서 번역과 통역, 밀사를 맡았다. 레닌은 이네사를 사랑했다. 크룹스카야도 이 관계를 인정했다. 그것은 미묘한 삼각관계였다. 혁명열차의 도착 뒤 삼각관계는 대충 정리됐다. 다음 해 이네사는 콜레라로 숨졌다. 레닌의 상심은 컸다. 레닌 부부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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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