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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 제3의 길을 모색하다

DEEP INSIDE │ 왜 지금 ‘숙의민주주의’인가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는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가.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에 대한 이슈는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찬반 논란을 촉발했다. [중앙포토]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는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가.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에 대한 이슈는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찬반 논란을 촉발했다. [중앙포토]

 

원전 건설 89일간 공론조사 결정
대의제 대안 vs 궤변, 평가 갈려

19세기 JS 밀도 대의제 한계 지적
대중 직접 참여와의 선순환 강조

흩어지면 기득권과 맞서기 어려워
광장보다 정당을 통한 실현 주장도

이슈에 충분한 지식을 갖춘 ‘지민’
숙의 주체돼야 합리적 결과 가능

지난 10월 20일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공론화위원회가 공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건설 재개 59.5%, 중단 40.5%로 건설 재개가 결정됐다. 471명 시민·전문가들이 89일 동안 숙의한 결과다. 이에 대해 숙의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 실험이었다는 평가와 “숙의민주주의라는 얼토당토않은 궤변으로 포장했다”(자유한국당)는 비판이 엇갈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숙의민주주의가 조명받기 시작했다.
 
숙의(熟議)는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한다’는 뜻이다. 숙의민주주의는 공정한 토론과 이성적 숙고, 충분한 숙지를 바탕으로 공적 현안을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민주주의 정치 과정이자 제도다. 민주주의 앞에 왜 굳이 ‘숙의’를 덧붙이는가? 시민을 대표하여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라고 설치한 대의(代議) 기관, 즉 국회와 국회의원들이 이미 있지 않은가.
 
제대로 민의를 대표하지도, 숙의하지도 못하는 국회, 사회적 갈등을 풀기는커녕 더 심각하게 만드는 국회의원들. 숙의민주주의는 이러한 대의제 현실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다. 시민이 맡긴 권력이 무책임하고 부패해지자 그것을 시민 참여로 회수한 촛불 광장의 경험이 큰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숙의민주주의는 단지 다수결 투표가 아니라 실질적인 숙의가 먼저라고 여긴다. 다수의 판단이 언제나 최선일 수는 없다는 점도 숙의민주주의가 부각되는 배경이다.
 
‘참여’정부의 연장은 아니더라도 부분적 계승이라 할 현 정부는 공론화위원회가 내놓은 결과를 그대로 수용했다. 앞으로도 유사 사안에 대해 비슷한 방식으로 결정한다면 숙의 편의주의·만능주의로 흐를 위험은 없는가? 공론화위원회는 문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많은 문제들의 시작이며, 민주주의에 관한 질문의 출발이다.
 
대의정부론 표지

대의정부론 표지

대의정부론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아카넷 
 
◆대의(代議)와 직접 참여의 선순환을 기대한 J S 밀=다수와 소수, 대중과 전문가, 직접 참여와 대의(代議)의 관계는 자유민주주의의 역사 초기 부터 중요한 문제였다. 예컨대 존 스튜어트 밀은 1861년에 발표한 『대의정부론』(서병훈 옮김)에서 대의민주주의가 대중의 직접 참여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오히려 많은 시민이 심의에 참여하고, 반복된 토론을 통해 심의 능력을 키워야 민주적 요소가 강화된다고 보았다.
 
대의제와 민주적 참여가 선순환하려면 시민 다수가 “일정 수준의 양심과 사심 없는 공공 정신”을 갖춰야 한다. 밀은 국민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이 조야(粗野)하면 대의민주주의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국가의 가치는 필경 그 국가를 조직하고 있는 국민의 가치다. 국가의 가치는 긴 눈으로 보면 결국 국민을 구성하는 개인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밀은 문제를 해결하는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숙련 민주주의(skilled democracy)를 구상한다. “한편으로 온전한 민주적 지배를 실현하고, 다른 한편으로 능숙한 전문가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자는 것. 그는 다수의 민주적 참여와 소수 전문가의 역할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숙련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잘 구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수결을 의심한다 표지

다수결을 의심한다 표지

다수결을 의심한다
사카이 도요타카 지음
현선 옮김, 사월의책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분권적 제도가 필요하다=“다수결이라는 의사결정 방식을 당연하다는 듯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관습 같은 것이지, 다른 방식과 비교해서 다수결이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카이 도요타카 교수(게이오대)는 『다수결을 의심한다』에서 이렇게 묻는다. 다수결은 과연 민주적인가? 주권자가 입법·행정에 거의 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형식적인 다수결 방식만 가지고서 마치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은 아닌가?
 
과도한 행정 권력이 주권자인 국민의 결정권과 행복권을 침해하는 상황이 빈발한다. 이 때 주권자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는 없을까. 사카이 교수는 다수결 원칙과 대의제의 관성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분권적 제도를 설계하자고 제안한다. 예컨대 도로를 건설한다면 도로 공사 전체에 관한 사항을 시민들이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국민 개개인에게 도로 공사 일체에 대한 평가 금액을 묻고, 이 결과와 건설비용을 비교하여 사회 편익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우리 일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려면 기존 원칙과 제도를 의심하고 대의제의 한계를 넘어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시민 참여에 바탕을 둔 분권적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추측건대 사카이 교수는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공론화위원회를 일단 높이 평가할 듯하다.
 
포스트 민주주의 표지

포스트 민주주의 표지

포스트 민주주의
콜린 크라우치 지음
이한 옮김, 미지북스 
 
◆그럼에도 ‘광장’이 아니라 ‘정당’이 중요하다=영국의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포스트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처한 역설적인 상황을 지적한다.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와 법치 국가 성격이 유지됨에도, 국민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을 선출된 정부가 배신하는 상황이다. 더구나 선거는 많은 유권자들의 무관심과 냉소 속에서 후보 개인의 이미지 연출, 마케팅과 광고 기법 등이 좌우하는 일종의 쇼 비즈니스가 되어버렸다.
 
크라우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약 25년을 ‘민주주의 시대’로 본다. 정당이 계급 관계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면서 계급 간 경쟁과 타협이 정치의 기본 구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의 쇠퇴와 글로벌 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정당 정치는 더 이상 계급 관계를 대변하지 못하게 되었고, 민주주의의 형식과 절차만 남았다. 대의제가 본래 취지를 실현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시민들이 정당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정당 바깥 사회 운동에 힘을 보탬으로써 정당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크라우치가 이렇게 정당을 중시하는 이유는 시민의 정치 행동이 개별 법안이나 이슈에 따라 파편화되면 기득권 집단에 맞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당을 버리고 사회 운동을 택하지 말라는 충고다. 만일 크라우치에게 우리나라의 공론화위원회를 묻는다면? 보완 수단일 수는 있어도 근본 대안은 아니라고 할 법하다.
 
지민의 탄생표지

지민의 탄생표지

지민의 탄생
김종영 지음, 휴머니스트 
 
◆숙의하는 주체는 ‘지민(知民)’이다=숙의민주주의는 주체의 합리적 판단과 공정한 자세 등을 전제로 한다. 전문 지식을 독점하는 소수 전문가나 정치인이 아니라 상식을 갖춘 시민이 숙의의 주체다. 경희대 김종영 교수(사회학)는 『지민의 탄생』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시민이자 시민으로서의 지식인, 곧 지민(知民) 개념을 제시한다. 지민은 사회 문제와 공적 이슈를 스스로 공부하고 참여하는 시민이다.
 
김종영 교수는 지민의 형성 과정을 삼성 백혈병 문제, 황우석 사태, 4대강 사업 등을 통해 조명하고 대통령 탄핵도 지민의 맥락에서 파악한다. 2000년대 이후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지식정치’의 장이었다. 그 장의 행위자는 크게 둘이다. 지식엘리트와 정치엘리트가 결합된 지배지식동맹이 하나다. 이 동맹은 시민에게 위임 받은 자격을 바탕 삼아 시민을 상대로 지식정치를 펼친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각성하고 연대하여 지배지식동맹에 대항하는 시민지식동맹이다.
 
시민의 권리를 자각하고 행사하는 존재가 전통적인 의미의 시민이라면, 지민은 전문적 지식의 미명 아래 공적 사안을 좌우하려는 지배지식동맹에 맞서는 지적 주체다. “지민은 시민과 지식인의 지적 위계를 전복시키고 자신들의 지식으로 판단하고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이다.”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을 김종영 교수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숙의민주주의는 지민을 전제로 한다고 답하지 않을까.
 
표정훈 출판평론가
 
민주주의를 숙의하는 책들
① 『민주주의의 모델들』(데이비드 헬드 지음, 후마니타스)=고전적 민주주의, 공화주의, 자유민주주의 등 현대의 여러 민주주의 모델을 살핀다. 저자는 ‘숙의와 참여’를 강조.
 
② 『왜 대의민주주의인가』(강정인 외 지음, 이학사)=대의민주주의가 본래 숙의를 목표로 구상된 정치 체제이며 오늘날 대의제의 위기는 숙의 공간의 확대로 풀어야 한다는 내용.
 
③ 『우리의 민주주의거든』(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글항아리)=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함께 패스트(빠른) 민주주의에서 “깊은 사려와 진지한 토의”에 바탕을 둔 숙의(느린) 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
 
④ 『추첨 민주주의』(마이클 필립스 외 지음, 이매진)=대의제와 선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작위 추출 통계 기법을 활용하여 전체 국민의 실질적 축소판인 시민 의회를 구성하자는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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