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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도 왔다 … 미국 대통령들은 언제 한국에 왔을까

1952년 12월 한국전쟁 도중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서부전선 최전방 미군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과 야외에서 함께 식사하고 있다.

1952년 12월 한국전쟁 도중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서부전선 최전방 미군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과 야외에서 함께 식사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비극 안에서 만나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한국 땅을 밟았다. 정확히 말하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라 ‘당선인’ 신분이었지만, 한국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걸고 대통령이 된 그는 서부전선 최전방 미군부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1960년 6월. 국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1960년 6월. 국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이후 아이젠하워는 1960년, 정식 미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다시 한 번 한국을 찾는다. 미국 대통령의 첫 국빈 방한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가난하기 이를 데 없던 한국에 경제 원조 등을 약속한다.  
 
베트남전의 격랑 속에서 손잡고
1966년 10월 31일. 한국을 찾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린든 존슨

린든 존슨

당시 미국은 무리한 전쟁이라는 안팎의 비난 속에서 베트남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존슨 대통령이 찾는 곳마다 반미 시위가 일었다.
그러나 한국만은 달랐다. 180만 명 넘는 인파가 몰려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정부 차원에서 동원한 이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존슨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온 열렬한 환영이었다.  
 
당시 존슨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  
1964년 베트남에 비전투부대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전투부대까지 보내, 수만 명을 파병한 한국은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였다. 한국의 입장에선 미국의 경제 원조가 절실했다. 뜨거운 한미 공조가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두 정상은 ‘아시아 내에서 공산 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데도 뜻을 같이한다.  
 
‘코리안게이트’ ‘주한미군 철수’로 갈등하면서도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탄 차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탄 차

1979년 6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의 고심은 깊었다.  
‘워터게이트’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한 후 치러진 선거에서 ‘도덕성 회복’을 내걸고 당선된 카터는, 외교에 있어서도 인권을 중시했다.  
그는 한국 인권 상황 등을 거론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참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미국 의원들의 한국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뇌물을 제공했다는 ‘코리안 게이트’가 터져 한미 관계가 최악이었던 때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박정희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철수’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으로 남북 간 긴장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한국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미 정부를 설득하면서도, 만약 철수가 결정될 시 그 시기를 가능한 한 늦추는 방안을 마련하려 했다.
그런 한편 카터를 한국에 초청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방한이 성사되고 박 대통령은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정성을 쏟았지만, 정상회담 분위기는 싸늘했다. 카터는 정치범을 석방하라고 요구했고,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를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내한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함께 나란히 미소를 띠고 있는 옆모습.

박정희 대통령과 내한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함께 나란히 미소를 띠고 있는 옆모습.

 
이후 카터는 미 의회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주한미군 철군 결정을 백지화한다. 그가 ‘철군 결정’을 접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미군 대북정보담당관 존 암스트롱의 보고서였다는 사실이 몇 년 전에야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암스트롱은 북한의 전력이 남한보다 우위라고 분석한 보고서로 대통령을 설득했다.
 
 
한국의 경제 위상이 달라지자
1989년 2월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를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키고 상호교류하겠다고 발표한 7ㆍ7선언으로 한반도 긴장이 완화됐을 때였다.
이때 방문한 부시 대통령은 노태우 정부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밝히고, 주로 경제 관련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부시는 한국이 중요한 무역 강국임을 강조하며 사실상 시장 개방을 요구한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하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오산 공군기지를 방문했을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오산 공군기지를 방문했을 당시.

그러다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는 일이 벌어진다. 같은 해 7월 한국을 방문한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종말을 맞을 것”이라 경고했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북한의 핵무기 위협은 한국을 방문하는 미국 대통령들의 중요한 의제가 됐다. 2002년 한국을 찾은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2012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모두 북한의 도발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다. 부시 대통령의 경우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일컫고 불과 2주 후에 방한길에 올라 더욱 주목받기도 했다. 오바마 역시 북한을 ‘왕따 국가’라 칭하면서 한미간 공조를 과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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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시아 국가들을 순방중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역시 북한은 중요한 문제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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