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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국 한국, 국제법으로 무장해 국익 지켜야…국가적 지원 필요”

1905년 10월22일 고종의 미국인 밀사 호머 헐버트가 친서를 품고 미국으로 떠났다.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고종은 1882년 체결된 조·미 수호통상조약 1조의 ‘선위조처(善爲調處)’를 떠올린 것. 고종은 선위조처를 ‘제3국이 조선과 미국 중 어느 한 나라에 피해를 입힐 경우 반드시 서로 도움을 준다’는 말로 이해하고 미국의 도움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영어로 ‘exert their good offices’로 쓰이는 선위조처는 국제법상으로 ‘분쟁 당사국들이 원만히 타결하도록 알선한다’는 뜻에 불과했다. 고종의 친서는 미국으로부터 외면당했고, 곧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한다. 미국이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통치를 인정한 사실도 모른 채 국제법에 매달린 고종에게 돌아온 결과는 참혹했다.
 

세계 3대 ‘국제해양법재판소’ 소장 선출된 백진현 교수
“재판 결과 영구히 유지…함의 파악 못하면 국익 손해”
“국제관계에서 법의 역할 더 커져…국제법 무장 필요”
“최근 한국서 국제법 위축 안타까워…꼭 필요한 공공재”

이처럼 국제법으로부터 아픈 배신을 당했던 나라에서 그로부터 112년이 지나 세계 3대 재판소 중 한 곳의 수장을 배출했다. 지난달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International Tribunal for the Law of the Sea) 소장으로 선출된 백진현(59)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다. 1996년 출범한 ITLOS는 국제사법재판소(ICJ)·국제형사재판소(ICC)와 함께 세계 3대 재판소로 꼽히며, 해양과 관련된 모든 분쟁을 다룬다. 21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며, 재판관 임기는 9년이다. 소장 임기는 3년이다.
 
백진현 신임 국제해양법재판소장. 2020년까지 소장 직무를 수행한다. [사진 외교부]

백진현 신임 국제해양법재판소장. 2020년까지 소장 직무를 수행한다. [사진 외교부]

백 신임소장은 재판소가 있는 독일 함부르크로 출국하기 직전인 지난달 26일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국제관계는 힘만으로는 좌우되지 않으며, 복잡해지는 구도 속에서 법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중견국은 국제법을 국익을 수호하는 수단으로 잘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소장은 또 “한국은 모든 이웃과 바다로 경계를 갖고 있으며 해운 강국이자 어업 강국”이라며 “해양과 해양법이 한국에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소장으로 취임한 소감은.
“ITLOS는 해양에서 일어나는 국가 간 분쟁은 모두 다룬다. 모든 분쟁에 국가의 주권이 걸려 있는 만큼 당사국들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신뢰란 것은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 최대한 공정하게 판결하고 이런 판례들을 쌓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
 
ITLOS가 다룬 분쟁은 어떤 것들인가.
“ITLOS의 판결은 당사국들이 지켜야 하는 법적 구속력이 있다. 현재까지 25건의 판결이 있었다. 2012년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간의 해양경계 획정 분쟁을 다뤘다. 200해리를 넘어서는 대륙붕의 경계를 확정한 것은 국제 재판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렇게 판결을 통해 그은 경계는 영원히 유지된다. 모든 국가가 이런 판례를 지킬 필요는 없지만, 과거 판례가 국가 간 협상 등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판례를 공부해서 자국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 연구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만 손해다.”
 
예를 들 수 있는 판례가 있을까.
“지난해 필리핀과 중국 사이에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대한 중재재판소 판결이 있었다. 남중국해 상의 큰 산호초를 바위로 볼 것인지, 섬으로 볼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해양법상 섬이 되면 배타적경제수역을 누릴 수 있고, 대륙붕도 향유할 수 있다. 그런데 중재재판소는 이를 바위로 판단했다. 이 논리를 다른 지역에도 적용하면 많은 섬이 바위가 될 것이다. 구속력은 없지만 중요한 함의가 있다.”
 
필리핀·중국 중재재판소 판결에서 중국의 시설물 건축을 환경오염으로 판단했는데, 독도에 시설물을 건축할 경우 일본이 같은 논리로 한국을 제소할 수도 있는가.
“특정 사안에 대해 관련성을 언급하기는 어렵다. 다만 해양 환경과 관련된 분쟁에 있어 재판소들이 매우 전향적이고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이런 함의를 각국 외교부에서 잘 주시하고 정책 검토에도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악수하는 강경화 장관과 백진현 소장   (서울=연합뉴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최근 당선된 백진현 국제해양법재판소 소장이 18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2017.10.18 [외교부 제공=연합뉴스]   scoop@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악수하는 강경화 장관과 백진현 소장 (서울=연합뉴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최근 당선된 백진현 국제해양법재판소 소장이 18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2017.10.18 [외교부 제공=연합뉴스] scoop@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소장으로 선출된 배경이 있다면.
“3년마다 재판부를 새로 구성하면서 소장을 선출하는데, 입후보하는 것이 아니라 재판관 21명의 이름이 모두 적힌 투표용지를 재판관 전원에게 나눠준다. 저는 사실 선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을 못 했는데, 동료들이 지지를 많이 해줘서 선출됐다. 한국 정부는 ITLOS가 개발도상국에서 역량 배양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초기부터 큰 지원을 하고 있다. 이런 부분도 제가 소장으로 선출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국가들이 ITLOS에 분쟁을 회부하기보다는 유엔해양법협약 상 중재제도를 더 많이 활용하는 분위기다. ITLOS의 위상과 연결되는 문제 아닌가.
“중재제도를 이용한 중재재판은 임시재판소에서 이뤄지며, 재판관도 따로 선임해야 한다. ITLOS는 상설재판소이며, 재판관도 이미 구성돼 있다. 재판 진행이 빠르고, 임시재판소보다는 더 권위 있는 판결이 가능하다. 이는 곧 당사국들이 수락하고 판결대로 집행할 가능성도 더 커진다는 뜻이다. 또 당사국이 원하면 ITLOS에서도 재판관 5명으로 소재판부를 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사국이 21명 재판관 중 원하는 사람을 지명할 수 있고, 외부 인사 선임도 가능하다. 소재판부 절차를 이용하면 중재재판소로 가는 것보다 1~2년은 빨리 분쟁을 매듭지을 수 있다. 저는 ITLOS의 장래를 낙관한다.”
 
한국 관련 분쟁이 아직까지 ITLOS에서 다뤄진 적은 없는데.
“우리나라는 조선업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해운 강국이자 어업 강국이다. 역사적으로도 바다로 뻗어 나갈 때 한국은 발전했다. 또 우리는 중국·일본 같은 이웃 국가들과 바다 경계를 갖고 있다. 문제가 될 일도 많고 협력할 일도 많다. ITLOS에 한국 관련 분쟁이 계류돼 있는지 여부를 떠나 해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ITLOS의 발전이 한국의 국익에도 부합한다.”
 
국제법도 결국 강대국에게 유리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최근에도 크림반도 문제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제소했다. 국가 간 협상에서는 군사력·경제력·외교력이 센 강대국이 더 많은 레버리지를 갖고 있고 유리하지만 법은 보편적·객관적이라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된다. 작은 나라, 또 우리나라 같은 중견국일수록 국제법을 국익 수호를 위한 수단으로 잘 활용해야 한다. 국제관계는 힘만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또 구도가 복잡해지면서 점점 법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제소해 국제 분쟁이 되면 큰 나라들이 더 수세적이고 방어적으로 나오는 추세다. 작은 나라라 하더라도 부당한 피해를 입었다면 국제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
 
백진현 신임 국제해양법재판소장. [사진 국제해양법재판소]

백진현 신임 국제해양법재판소장. [사진 국제해양법재판소]

과거 열강들은 국제법을 식민 지배에 활용했는데.
“최근까지 아시아국제법학회 5대 회장으로 일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 입장에서 보면 국제법이 압제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방편으로 이용됐다는 점에서 국제법을 불신하는 정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도 만국공법을 들고 와서 꼼짝 못 하게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국제법의 형성 과정, 적용 과정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참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 우리만 손해라는 문제의식에서 10년 전 학회가 설립됐다. 좋든 싫든 국제법은 현실이고,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로스쿨 도입 이후 한국에서 국제법 분야가 위축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걱정이 크다. 과거에 비해 국제법이 규율하는 분야와 비중이 훨씬 커졌는데 국제법 분야로 진출하는 우리 젊은이들이 줄었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변호사들이 모여 법리 경쟁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한두 달 간의 숙의를 거쳐서 판결을 하고, 그 판결은 구속력이 있으며, 국가 간 분쟁을 최종적으로 해결한다. 이것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현실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제가 대학생일 때보다 더 국제법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 같다.”
 
한국에게 국제법은 왜 중요한가.
“우리나라는 큰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고, 지정학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힘만 갖고서는 우리의 자율성과 평화를 지키기 어렵다. 국제법으로 무장해 상대방을 설득하고 국익을 수호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취업의 기회도 제한돼 있고, 철옹성 같은 유럽 국가 출신들과 경쟁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은 우수하고,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나라의 주권과 이익을 지키는 보람 있는 길이다. 유럽에 가보면 국제법을 공부하는 중국인 학생들은 어느 곳에나 있다.”
 
일본 외무성 조약국은 거의 모든 차관이 거쳐 가는 이른바 엘리트 코스로 꼽히는데, 한국은 다른 듯하다.
“일본은 국제법을 굉장히 빠르게 받아들인 나라다. 외무성의 많은 인재들이 조약국 출신이다. 우리 외교부 국제법률국은 예전보다 사기가 좀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국제법은 공공재 성격으로 봐야 한다. 꼭 필요한 공공재를 시장 논리에 맡겨두면 안 된다.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국제법 인재들을 양성해야 한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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