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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중세 국가 사우디, '침묵의 계약' 깨고 정상 국가로 가나

[글로벌 뉴스토리아] 사우디의 혁명적 변신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가운데)가 지난달 24일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투자 이니셔티브’ 콘퍼런스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왼쪽),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오른쪽)과 나란히 앉아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극보수적인 왕국을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되돌리겠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가운데)가 지난달 24일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투자 이니셔티브’ 콘퍼런스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왼쪽),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오른쪽)과 나란히 앉아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극보수적인 왕국을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되돌리겠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 정치, 왕위 형제 상속, 여성 차별, 엄격한 복장 규정, 죄인에 대한 태형과 공개 참수형 등등 21세기에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신정 체제로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가 혁명적인 변신을 추구하고 있다.

복지 제공하며 율법과 전제군주제에 침묵 강요
32세 무함마드 왕세자, 개혁 드라이브 시동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 상장해 1000억 달러 마련
첨단산업 진흥해 여성과 소외계층 일자리 창출
복지 의존 대대적으로 고치는 국가 개조사업 시동
기득권층 반발 무마가 관건-국민 요구 붓물 가능성도

 
그 중심에는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82) 국왕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32) 왕세자 겸 국방장관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6월 21일 사촌 형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알사우드(58)를 밀어내고 왕세자가 된 무함마드 왕세자는 연로한 국왕을 보좌해 왕실과 정부의 실권자로 군림하고 있다.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는 별명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우디는 지금까지 ‘두 개의 기둥’이 전제왕정을 유지해 왔다. ‘와하비즘’으로 불리는 엄격한 이슬람주의와 ‘석유 복지’가 그것이다. 이슬람계는 엄격한 와하비즘 율법을 유지하는 대가로 종교계는 군말 없이 알사우드 왕가의 지배를 용인하고, 국민은 두둑한 복지와 일자리를 제공받는 대가로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왕족들은 특권을 보장받는 대신 국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골자다. 서구에선 이를 ‘침묵의 계약’으로 부른다.
 
율법 국가 이미지 벗겠다는 폭탄선언
무함마드 왕세자는 앞으로 이러한 ‘침묵의 계약’을 깨고 중세에 살던 ‘괴팍한 아라비아 왕국’ 사우디를 21세기 정상적인 국가로 개조하는 개혁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무함마드가 지난달 24일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극보수적 이슬람 왕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온건 이슬람 국가’로 되돌려 놓겠다”고 한 발언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시민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개방 사회로 변화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국제사회에서 사우디의 최대 급소로 꼽히는 엄격한 중세 율법 국가 이미지를 벗겠다는 폭탄선언이다. 이는 사우디의 국가 정체성을 뒤흔들 수 있는 메가톤급 발언이다.
 
이 발언은 서곡이었다. 무함마드는 같은 날 수도 리야드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미래투자 이니셔티브 콘퍼런스(FII)에서 울트라급 경제개발 계획을 공개했다. 요르단·이집트와 가까운 사우디 서부 홍해와 아카바만 연안 지역에 5000억 달러(약 564조원)를 투자해 서울의 44배 규모인 2만6500㎢ 면적의 신도시를 건설하고 미래형 신경제구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눈에 띄는 것이 이 경제구역에서 중점적으로 발전시킬 분야에 로봇 등 첨단기술 산업은 물론 신재생에너지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들어갔다는 점이다. 신재생에너지에 투자하겠다는 말은 지금까지 사우디 경제를 지탱해 온 석유 산업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겠다는 뜻이다. 사우디는 석유 국영화를 통해 국가 독점산업으로 유지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나라 경제를 꾸려 온 대표적 석유 의존 국가였다. 1932년 사우디를 개국한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이븐 압둘라흐만 알사우드(1875~1953서구에선 이븐사우드로 부름)는 엄격한 전제군주제를 확립했다. 그와 후계자들은 정당이나 의회 구성, 선거와 같은 국민의 정치적 참여를 철저히 배제했다. 불만에 찬 국민이나 일부 왕족이 민주주의 도입을 주장하면 금전 등으로 회유하거나 외국으로 추방했다. 사우디는 국민이 권력을 견제하는 대신 권력이 국민을 감시·통제하는 엄격한 ‘경찰국가’가 됐다. 대신 석유로 번 돈으로 국민에게 고용·의료·교육 등에서 시혜성 ‘석유 복지’를 베풀며 정치적·종교적·사회적 불만을 무마하려고 시도해 왔다. 이것이 ‘침묵의 계약’의 이면이다. 이런 고리를 끊고 석유 중독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 무함마드의 포부다.
 
무함마드가 자기 뜻을 관철하려면 나라의 경제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그동안 사우디는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그 상징인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를 왕실이 움직여 왔다. 거기서 나온 오일머니는 ‘침묵의 계약’을 유지하는 바탕이었다. 현재 사우디가 추진 중인 아람코의 기업공개(IPO)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올 자금을 바탕으로 경제 구조 혁신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람코의 기업가치는 2조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지분의 5%만 상장해도 1000억 달러 정도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전 세계 IPO 사상 최대 규모다. 런던 증시와 뉴욕 증시가 군침을 삼키며 경쟁하고 있는데 시기는 2018년이나 2019년으로 예상된다.
 
사우디는 여기서 얻을 자금으로 국부펀드를 조성해 미래형 산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그동안 사우디가 발표한 일련의 경제발전 계획을 종합하면 특히 산업 다각화로 석유 의존도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출 것으로 전망된다. 사우디는 최근 문화·스포츠·관광 산업 진흥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사우디가 그토록 미워하던 카타르의 ‘번영의 길’을 상당히 벤치마킹한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 사회적 약자와 여성의 취업을 촉진하는 것이 중간 목표다. 국민이 정부 복지에 의존해 살아가는 분위기를 일신하고 사우디를 ‘일하는 나라’로 바꾸겠다는 의도다. 석유가 고갈되거나 유가가 더욱 떨어져 석유 복지를 제공하지 못해도 다른 산업을 진흥해 일자리를 마련하면 국민의 불만이 줄어들 것이란 계산이다. 문제는 이를 이루려면 여성의 사회적 권리가 신장하고 보다 자유로운 나라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을 연상케 하는 감시사회에 여성의 복장까지 제한하는 나라에서 문화와 스포츠·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자랄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왕실과 종교계도 변화를 감수해야 할 처지다. 무함마드는 왕족 특권도 왕실의 ‘고통 나누기’의 하나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슬람 교육을 중심으로 교육 산업을 사실상 독점해 온 이슬람계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무함마드가 교육 개혁을 앞세워 보통 교육을 확대해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일반인의 고용 창출을 유도하겠다고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슬람 청교도’ 와하비즘 장벽 넘을까
지난달 23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킹파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건국 87주년 행사장에 처음으로 참석이 허용된 여성들이 온몸을 가리는 전통의상 아바야를 입고 앉아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3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킹파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건국 87주년 행사장에 처음으로 참석이 허용된 여성들이 온몸을 가리는 전통의상 아바야를 입고 앉아 있다. [AFP=연합뉴스]

무함마드가 종교계를 건드리지 않으면 개혁은 완수될 수 없다. 하지만 사우디 종교계의 핵심인 이슬람 와하비즘은 사우디 왕실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는 데 그의 고민이 있다. 와하비즘은 이슬람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정통파·초보수파·엄격파·근본주의자·이슬람 청교도 등으로 불린다. 시대적 변화를 이단적 요소로 보고 이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유일신만 받드는 중세 때의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 운동이다. 18세기 이슬람 신학자 무함마드 이븐 암드 알와하브(1703~1787)가 주창해 와하비즘으로 불린다. ‘살라프(초기 무슬림 선조)’의 정신을 따른다고 살라피즘이라고도 한다.
 
여성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남자 가족이나 친척을 대동하고 온몸을 가리는 아바야를 입고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는 니캅을 착용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의 운전을 금지하고 스포츠 관람을 하지 못하게 한 것 등 여성 억압으로 비판받는 다양한 조치가 여기서 비롯됐다.
 
알와하브는 사우디의 알사우드 가문과 손을 잡으면서 무력까지 얻었다. 현재 사우디 수도 리야드 인근에서 활동했던 알와하브는 1744년 부족장 집안이던 알사우드 가문과 협정을 맺고 정치적 복종을 서약하는 대신 이슬람 개혁운동 수용과 보호, 그리고 지원을 악속받았다. 그 징표로 사돈까지 맺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와하비즘이 이슬람 시아파에 지극히 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알와하브는 시아파의 성자 묘지 방문 등을 ‘우상 숭배’ ‘불결하게 변형된 이슬람’으로 간주해 정화를 주장했다. 이에 호응한 알사우드 가문은 1801년 이라크 남부 카르발라를 점령해 시아파 성지를 파괴했다. 알사우드의 무력이 와하비즘의 배타주의와 결합한 사건이다. 알사우드 왕가와 경쟁적인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에서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보수파가 정국을 장악하자 이에 대한 경계심에서 사우디가 지난 30년 가까이 개혁을 미뤄 온 측면도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지난달 24일 인터뷰에서 이러한 내용의 ‘이란 책임론’을 거론했다.
 
사우디는 1953년 이래 지금까지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의 아들들이 국왕으로 즉위해 왔다. 이런 형제 상속제는 국왕의 아들인 무함마드가 왕세자가 되면서 부자 상속제로 바뀌게 됐다. 사우디 왕실은 새 계승 체제를 시작하면서 대대적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 상황이다. 사우디의 개혁은 단순한 개발과 투자의 촉진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국가가 거의 전 영역에서 오랫동안 미뤄 왔던 근대화 사업을 광범위하게 추진하는 모습이 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보수 이슬람계 등 기득권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국민 요구가 봇물처럼 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오랜 ‘침묵의 계약’을 깨고 새 시대를 열 수 있을지 세계가 주목한다. 한국은 이 과정에서 어떻게 사우디와 협력할지를 고민할 때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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