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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혈한 샹잉, 국민당 감옥서 풀려난 부인 총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53>
항일전쟁 초기, 저우언라이(앞줄 오른쪽 둘째)와 함께 8로군 연락사무소를 방문한 샹잉(앞줄 오른쪽 첫째). 1938년 가을 후베이성 우한(武漢).

항일전쟁 초기, 저우언라이(앞줄 오른쪽 둘째)와 함께 8로군 연락사무소를 방문한 샹잉(앞줄 오른쪽 첫째). 1938년 가을 후베이성 우한(武漢).

신4군 군장 예팅(葉挺·엽정)은 소문난 애처가였다. 부부가 늘 붙어 다니고 자녀도 많았다. 비행기 추락으로 인간세상도 같을 날 하직했다. 부군장 샹잉(項英·항영)은 냉혈한 소리를 들었다. “국민당 감옥에서 고초 겪다 풀려난 부인을 제 손으로 쏴 죽였다. 난생 처음 보는 딸과도 12일 만에 등을 돌렸다.”

폐병으로 상하이병원 입원하려던
중공 2대 총서기 취치우바이
국민당 보안대에 체포될 때
동행한 부인 장량이 신분 누설 의심
샹잉, 신4군 찾아온 부인 죽여

 
중국 인명사전에 장량(張亮·장량)이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중국 공산당의 우수당원.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이며 군사가. 중국 공산당이 어려웠던 시절, 샹잉의 처. 적에게 취치우바이(瞿秋白·구추백) 동지를 팔아넘긴 반도(叛徒)라는 이유로 샹잉에게 처형당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도 이런 내용이었다.
 
1931년 여름, 상하이 지하당원 장량이 동료의 부인을 찾아갔다. 가슴에 갓 태어난 핏덩어리를 안고 있었다. “나는 소비에트에 있는 남편을 찾으러 간다. 잘 돌봐 주기 바란다.” 훗날의 신중국 농업부장과 한 방에 살던 젊은 부인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애 아빠가 누구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샹잉의 딸이다. 비밀로 해라. 힘들면 저장(浙江)의 지하당을 찾아가라.”
 
젊은 부인은 저장 지하당 책임자 린디셩(林迪生·임적생)에게 애를 맡겼다. 훗날 란저우(蘭州)대학 총장까지 역임한 린디셩이었지만, 당시에는 지하생활자였다. 갓난 애를 양육할 방법이 없었다. 타오싱즈(陶行知·도행지)가 운영하는 고아원이 떠올랐다.
 
타오싱즈는 공산당과 교분이 두터운, 세계적인 평민교육가였다. 그날 일기를 남겼다. “낯선 사람이 샹잉의 딸이라며 어린애를 데리고 왔다. 소비에트 중앙국 서기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의 딸이라니 어이가 없다.”
 
예팅부부와 자녀들.

예팅부부와 자녀들.

타오싱즈는 교사 한 사람을 선정했다. “이 애를 잘 돌봐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 난다.” 이름을 묻자 즉석에서 지어 줬다. 샹(項)은 희성이었다. 샹잉의 딸인 줄 의심할까 봐 성은 장(張)으로 했다. “이름은 쑤윈(蘇雲)이다. 장쑤(江蘇)지방에 떠도는 구름 같은 애다.” 장쑤윈은 6살이 되자 신안소학(新安小學)에 입학했다. 타오싱즈가 어려운 집 애들에게 좋은 교육시키겠다며 설립한 학교였다.
 
항일전쟁이 발발했다. 신안학교 교장도 평범한 교육자가 아니었다. 학생들과 함께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항일선전하겠다며 여행단을 조직했다. 쑤윈을 전담하는 교사를 불렀다. “쑤윈 데리고 시안(西安)으로 가라”며 묵을 곳까지 알려 줬다.
 
시안은 낯선 곳이었다. 1개월이 지나자 교사는 무일푼이 됐다. 쑤윈에게 제안했다. “이대로 있다간 굶어 죽는다. 너는 유랑극단에 들어가라. 밥은 굶지 않는다. 네가 자리 잡으면 나는 학교 선생자리 알아보겠다.” 교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쑤윈과 8로군 연락사무소에 가면 방법이 있다.” 교장은 쑤윈의 신분도 밝혔다.
 
8로군 연락사무소 주임은 긴장했다. 쑤윈의 신분 확인에 골몰했다. 샹잉의 딸이 맞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몇 개월 전 샹잉이 부인을 쏴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쑤윈이 4살 때 중국 홍군은 장시(江西) 소비에트를 탈출, 장정에 돌입했다. 샹잉은 유격전을 지휘하기 위해 소비에트를 떠났다. 중공 2대 총서기였던 취치우바이는 폐병이 심해 장정을 포기했다.
 
학생들에게 교재를 나눠주는 타오싱즈. [사진 김명호 제공]

학생들에게 교재를 나눠주는 타오싱즈. [사진 김명호 제공]

취치우바이의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중공 중앙은 취치우바이를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중간에 건강을 돌보기 위해 여전사 두 명, 마오쩌둥과 함께 중공 창당에 후난(湖南)성 대표로 참가했던 허수헝(何叔衡·하숙형)이 동행했다. 여전사 중 한 명이 샹잉의 처 장량이었다. 일행은 푸젠(福建)성 창팅(長汀)을 지나던 중, 국민당 보안대에 포위됐다. 도망치던 허수헝은 총 맞고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세 사람은 포로가 됐다. 취치우바이는 서생 출신답지 않았다. 혹형을 잘 견뎠다. 가명을 대며 의사라고 우겼다. 자신이 누구인지 끝까지 실토하지 않았다.
 
국민당 정보기관에 제보가 들어왔다. “취치우바이가 창팅 감옥에 수감 중이다.” 이미 갇혀 있던 중공 지하당원 중에 중공 고위층 얼굴 알 만한 사람들을 족쳐 댔다. 신분이 발각된 취치우바이는 형장으로 끌려갔다.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3년 후 장량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남편 샹잉을 만나러 신4군 사령부로 갔다. 샹잉은 부인을 반가워하기는커녕, 거칠게 몰아붙였다. “취치우바이 동지가 어떻게 죽었느냐? 사실을 폭로한 사람이 너냐, 아니면 동행했던 다른 여자냐? 그 덕에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왔느냐?” 장량은 억울했다. 당황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장량의 표정을 살피던 샹잉은 부쩍 의심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총을 뽑아 들었다. 그 후 아무도 장량을 보지 못했다. 쑤윈이 시안의 8로군 연락사무소에서 심사를 받고 있을 때였다.
 
쑤윈은 샹잉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하루는 연락사무소에 산간닝(陝甘寧)변구 주석 린보취((林伯渠·임백거)가 나타났다. 쑤윈에게 몇 마디 묻더니 수행원에게 지시했다. “샹잉에게 급전을 보내라. 딸이 있느냐고 물어봐라.” <계속>
 
 
김명호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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