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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런 정책 그대로, 현상유지 위한 트럼프의 ‘지루한 선택’

새 Fed 의장 제롬 파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1년 11월 연방준비제도(Fed) 이사 후보를 지명했다. 한 사람은 제러미 스타인(57)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제롬 파월(64). 뜻밖의 조합이었다. 스타인은 오바마 코드에 맞는 인물이었다. 반면 파월은 공화당 쪽이었다. 그때 백악관 대변인은 “(파월 지명이) 공화당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당파를 초월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파월이 일종의 미끼였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는지 Fed 통화정책회의에서 도드라진 표결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 재닛 옐런과 같은 편이었다. 한마디로 대세추종형이었던 셈이다.

공화당은 ‘준칙주의’ 테일러 원해
트럼프는 대세추종형 파월 지명
1980년 이후 첫 경제 비전공자
월가는 “무난한 선택했다” 반겨
위기 올 경우 대처 능력은 미지수

 
오바마 지명 이후 6년이 흘렀다. 그 미끼가 Fed 의장에 지명됐다.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의 선택이다. 트럼프는 2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 기자회견에서 “파월은 강하고 헌신적이며 똑똑하다”며 “상원 인준을 받으면 우리 나라의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이끄는 데 뛰어난 재능과 경험을 투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월도 “의회가 인준하면 물가 안정과 고용 확대를 위해 주어진 권한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역대 Fed 의장 지명 기자회견에서 나온 수사학과 거의 일치하는 말이다.
 
그러나 파월이란 존재는 최근 Fed 의장을 지낸 인물들과 좀 다르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약 40년 새에 처음으로 경제학 관련 학위를 갖지 않은 인물이 Fed 의장에 지명됐다”고 보도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1978년 지명한 조지 밀러가 법대 출신이다. 그는 이듬해인 79년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로 교체됐다.
 
변호사 출신으로 역대 의장 중 가장 부자
파월은 변호사 출신이다. 다만 재무부 차관을 지냈고 사모펀드 등에서 일했다. 올해 그가 공개한 재산 규모는 적게는 1970만 달러(약 220억원)에서 많게는 5500만 달러(약 620억원)에 달한다. NYT는 “역대 Fed 의장 가운데 가장 부자”라고 전했다. 그는 Fed 이사에 임명된 뒤 주로 금융감독 쪽에 초점을 맞췄다. 기준금리 조정 등 통화정책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뉴욕 월가는 반겼다. 블룸버그·CNBC 등 경제 미디어 등에 출연한 월가 분석가들은 대부분 트럼프가 무난한 선택을 했다는 쪽이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PIMCO)의 투자전략가인 리처드 클래리더는 CNBC와 인터뷰에서 “스마트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럴 만하다. 요즘 다우지수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지난주 2만3500선을 넘어섰다. 역사상 최고 경지다. 이런 흐름이 유지되기 위해 트럼프가 예측 불가능한 자신의 성격을 잠시 억누르고 무난한 인물을 고른 셈이다. 트럼프가 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론자인 테일러를 선택했다면 세계 주식과 채권 시장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월가 사람들의 말을 빌려 “파월 지명은 정책 지속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옐런이 세팅한 정책 일정을 충실히 따를 사람이란 얘기다. 파월 자신도 “Fed의 동료들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포함된 Fed 멤버들이 짜놓은 틀을 크게 흔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현재 Fed는 양적축소(QT) 중이다. 양적완화(QE) 시절에 사놓은 채권 등을 매달 250억 달러씩 팔고 있다. 그만큼 시중 자금이 줄어든다. 올 12월엔 기준금리 추가 인상을 시사해놓고 있다.
 
파월이 공화당 편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공화당 주류가 밀던 인물은 아니다. 워싱턴포스트(WP) 등은 “(공화당이) 존 테일러 스탠퍼드대 교수를 선호했다”고 전했다. 경제학계 사람들 사이에 유명한 ‘테일러 준칙(Taylor’s Rule)’을 90년대 고안한 경제학자다. 테일러 준칙은 물가, 물가 안정 목표치, 경제 실질성장률, 잠재성장률 등을 서로 더하고 빼 적절한 기준금리를 구하는 수식이다. 테일러 준칙은 산수 수준의 간단한 수식이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강력한 인플레 억제 장치다.
 
Fed는 중앙은행 중 재량주의 성격 강해
또 미국 내에서 한 세기 동안 이어진 돈을 사이에 둔 갈등도 엿보인다. Fed의 재량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한 금융통화정책(재량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프레더릭 미슈킨 전 Fed 이사는 강연 등에서 “미국은 독립 이후 전쟁이나 경제위기 순간에 자의적으로 돈의 가치를 폭락시켜온 역사를 갖고 있다”며 “이런 재량적인 정책이 낳은 돈 가치 하락에 많은 예금자가 분노했다”고 말하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70년대 후반 스태그플레이션(침체+인플레이션)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은 80년대 초 볼커의 인위적 침체 유도로 해결됐다. 그런데 이 또한 중앙은행의 재량적 판단에 따른 가파른 금리 인상이었다.
 
리치먼드연방준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인 로버트 헤철은 “돈 가치의 안정을 중시하는 쪽은 중앙은행이 사전에 정해진 기준에 따라 기준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는 장치(준칙주의)를 원했다”고 말했다. 이런 바람을 등에 업고 탄생한 게 물가안정목표제(인플레이션 타기팅)를 바탕으로 한 테일러 준칙 등이다. 공화당 의원들이 테일러를 Fed 의장에 적극적으로 천거한 까닭이다. 반면 성장을 중시하는 쪽은 준칙주의를 채권자들의 이익을 위한 논리로 받아들였다. 헤철은 “위기나 불황 순간 시중 금리가 급등하기도 한다”며 “준칙주의를 따르다 보면 위기 순간 금리 인하에 미적거리거나 반대로 올리는 일이 벌어진다”고 설명했다.
 
세계 어느 나라 중앙은행도 온전히 준칙주의이거나 재량주의인 경우는 없다. 두 극단 사이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 타깃(2%)을 천명했다. 이 타깃은 준칙주의로 가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테일러 준칙에 맞춰 기준금리를 조정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쪽이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시장의 신뢰를 지향하는 재량주의’에 가깝다. 인플레이션 타깃을 뚜렷하게 밝혀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면서 동시에 실물경제의 여러 상황을 감안해 통화정책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미국 Fed는 역사적으로 재량주의에 가까웠다. 세계 주요 중앙은행 가운데 인플레이션 타기팅을 아직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Fed 내부적으로 정한 물가 안정 목표가 있기는 하다.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멤버들은 물가·성장률·실업률뿐 아니라 ‘정치적인 상황’까지 고려해 기준금리를 결정하고 있다.
 
NYT는 파월 지명 직전 “트럼프가 현상 유지(파월)와 중대한 변화(테일러) 사이에 고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는 현상 유지를 선택했다. 공화당 주류는 머쓱해졌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기회가 없진 않다. 스탠리 피셔 Fed 부의장 후임을 정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부의장은 중앙은행 경험이 풍부한 내부자들이 지명되곤 했다. 하지만 경제 전공자가 아닌 파월 지명으로 경제이론에 밝은 인물이 부의장이 될 필요성이 커졌다. 공화당이 트럼프에게 경제이론가 테일러 지명을 촉구할 기회가 남아 있는 셈이다.
 
평온 이어지면 ‘역사적 행운아’ 될 수도
역대 Fed 의장 가운데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은 인물은 꽤 많았다. 초대 의장 찰스 햄린이 변호사였다. CNBC는 “80년대 이후 경제학 전공자가 Fed 의장에 임명되는 게 관행이긴 했지만 역대 의장의 업적과 경제학 전공 여부의 상관관계가 뚜렷하지는 않다”고 전했다. 실제 미국 황금기(Golden Age)인 51~70년 Fed 의장을 지낸 윌리엄 마틴은 영문학과 라틴어를 공부한 인물이었다. 마틴은 앨런 그린스펀(87~2006년)보다 몇 달 더 자리를 지켜 역대 최장수 의장이란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임기 동안 백악관을 거쳐간 대통령만도 다섯이나 된다.
 
마틴은 역사적 행운을 누렸다. 미 경제가 연 3~4%씩 성장했다. 일자리도 꾸준히 늘어나 실업률은 낮았다. 인플레이션이 머리를 들기 전이다. 경제 논리 지형에서도 케인스 이론이 주류였다. Fed 역사가들은 “마틴이 행운을 누리는 동안 쌓인 불균형이 73년 1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분출했다”며 “이후 Fed 의장들은 그의 뒷정리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모해야 했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경제학 비전공자들은 단명하곤 했다. 앞서 소개한 1년짜리 의장 조지 밀러가 대표적인 사례다. 밀러는 취임 직후 2차 석유파동이 발생했다. 지명자인 카터마저 재선에 실패했다. 급등하는 물가와 가라앉는 경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결국 물러났다. 헤철은 “그가 있는 동안 FOMC 멤버들은 양분됐다”며 “후임인 볼커가 의견 충돌 때문에 반년 가까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을 지경”이라고 지적했다. 경제 논리 지형에선 케인스 이론과 통화주의가 서로 맞서고 있는 형국이었다.
 
두 사람의 성공과 실패가 경제학 전공 여부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다만 파월의 앞날을 가늠해볼 잣대일 수는 있다. 트럼프가 현재 경제와 증시의 순탄한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지루한 선택(Boring Choice)을 했다”(CNBC). 평온이 유지되면 파월이 마틴처럼 역사적 행운아가 된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그는 시험대에 오른다. 트럼프가 파월의 매력으로 꼽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보다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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