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중앙시평] 보수주의자들과 공론화위원회

장 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 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계절은 순환한다고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에게 요즘은 회의와 좌절의 계절이다. 단순히 진보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때문만은 아니다. 깊은 회의는 과연 보수가 지금의 무기력에서 벗어나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지가 매우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발전주의 국가, 세계화 개방, 한·미 동맹이 보수의 전통적 가치였다면, 이러한 사고의 기둥들은 하나같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새로운 해법은 오리무중이고, 해법을 이끌어갈 인물이나 세력은 보이지 않는다.
 

보수 쪽도 공론화위로 상징되는
시민주도 정치를 끌어안을 때다
네트워크 시민들이 이슈 논하고
집단적 지혜 만들어가는 현실
이를 부정하면 수구로 타락해

빈사 상태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요즘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가 주어져 있다. 다름 아니라 최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활동을 계기로 다시 떠오른 시민주도 정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다수 민주국가에서 보수는 시민정치보다는 대의정치를 애써 강조해왔고 진보는 시민정치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여 왔다. 실제로 신고리 공론화위원회가 5·6호기 건설 재개를 결정한 이후에도 이 같은 관습적 구도는 변하지 않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은 공론화위원회의 역할을 외면하거나 또는 트집 잡기에 열중하고 있다. 반면에 진보세력 한편에서는 신고리 공론화위원회를 발판으로 삼아 헌법 개정과 같은 중대 이슈에 있어서도 시민 공론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산되고 있다.
 
세상사의 극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변화와 적응을 추구하는 것이 보수주의자라면, 필자는 보수주의자들이 공론화위원회로 상징되는 시민주도 정치를 끌어안아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고 믿는다. 지금 시민주도 정치를 외면하고 대의제의 복원과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또한 대의제를 제쳐두고 시민주도 정치를 앞세우는 것은 무책임할뿐더러 지난해 촛불시민들이 강조했던 촛불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시민주도 정치를 (1)부정하거나 (2)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3)전면적으로 확대하는 세 갈래 갈림길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왜 두 번째 선택을 해야만 하는지를 하나씩 검토해보자.
 
먼저 시민주도 정치를 부정하는 것이 왜 위험스럽고 비현실적인 선택인지부터 살펴보자. 최근 보수 성향의 학자, 언론인 대다수가 거들고 있는 공론화위원회 때리기의 기저에는 시민들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깔려 있다. 불과 수십 일 만에 보통의 시민들이 원자력발전의 안전성, 경제성, 지속 가능성, 대체 에너지와의 입체적 비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느냐’는 것이 이들 회의론자의 주된 논지다.
 
장훈칼럼

장훈칼럼

시민들이 이성적 토론을 통해 합리적 결과를 만들어낼 능력이 부족하다는 반(反)민주적 관점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이래로 끈질기게 민주주의의 역사와 함께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21세기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반론은 바로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바 있는 시민들의 역량이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급진적인 단체들의 정치 선동 시도가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 시민은 이를 외면했다. 촛불시민들은 끝까지 절제력을 유지했고 헌법과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대통령 퇴진이 진행되기를 요구했다.
 
마찬가지로 공론화위원회에 참여했던 시민참여단이 토론장 분위기에 휩쓸려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오히려 원전 공사 재개에 대해 의견이 팽팽하게 나뉘어 있던 20, 30대 시민참여단이 토론과 조사를 거듭할수록 꾸준하게 공사 재개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이에 힘입어 시민참여단 전체 의견이 공사 재개로 기울었다는 점은 시민들의 역량에 대한 회의를 잠재우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다른 한편, 공론화위원회 비판론의 대척점에는 시민주도 정치 중심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에 따르자면 서구의 상업자본주의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성장해온 대의제 민주주의는 이제 그 역사적 역할을 다했고, 오늘날의 네트워크 사회에 적합한 민주주의는 다양한 시민주도 정치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정치의 전면적인 변환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점은 인간이 갖는 합리성에는 한계가 있어서 세상은 오직 점진적으로만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보수주의자들로서는 소화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에게 남는 대안은 공론화위원회를 포함한 다양한 시민주도 정치를 비판적으로, 하지만 진지하게 끌어안는 것이다. 현실을 부정할 때 보수주의자는 수구세력으로 타락하게 된다. 네트워크 시민이라는 도도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들과 대의제가 공존·경쟁하는 구체적 방책을 고민할 때 보수주의자는 고립과 무기력의 계절을 벗어나 봄을 기약할 수 있다.
 
장 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