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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사이 ‘서핑 외교’ 수백억 달러 챙긴 두테르테

‘초법적 처형’ 논란 속 지난달 18일 교정본부를 찾은 두테르테 대통령. [AP=연합뉴스]

‘초법적 처형’ 논란 속 지난달 18일 교정본부를 찾은 두테르테 대통령. [AP=연합뉴스]

지난달 19일 필리핀 마닐라의 콘래드 호텔.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창설 50주년을 기념하는 고위인사 포럼 연단에 13차 아세안 정상회의(10~14일) 의장국인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올라섰다. 두테르테는 지난해 6월 취임한 이후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며 즉결처분으로 수천명을 사살하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이를 비판하자 ‘창녀의 자식’(son of a whore)이라 불러 국제사회에 충격을 안긴 인물이다. 유럽연합(EU)에 대해선 위선자라며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보이기도 했다.
 

100년 친미에서 친중으로 전환
중·일에 밀착해 실리 따내

‘포스트 미국’ 대비한 곡예 외교
중국 지배 우려하는 군부선 견제

두테르테, IS 소탕에 앞장서자
각국은 인권유린 비판 수위 낮춰

흰 셔츠 차림으로 350여 명의 외교관과 학자, 언론인 앞에 선 그는 외신으로 전해진 터프한 이미지와는 멀어 보였다. 느릿 느릿 무대로 걸어 간 72세 대통령의 표정은 천진스럽기까지 했다. “중요한 자리라 준비된 (아세안과 관련된)원고를 읽겠다”고 운을 뗐지만, 바로 EU 등에 대한 비판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얘기하는 문명화된 방법으로 (마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와라. 환영한다”고 했다. 원고 없이 10분간 이어진 즉흥 연설이었다. 그 뒤 “이제 읽겠다”고 하고는 아세안의 평화와 통합을 강조했다.
 
초법적 처형 비난에도 국내 지지 고공
 
탈 미국 행보를 보인 그는 중국 정상과는 수차례 만났다. [AP=연합뉴스]

탈 미국 행보를 보인 그는 중국 정상과는 수차례 만났다. [AP=연합뉴스]

마약 단속 경찰의 ‘초법적 처형’을 규탄하는 시위 속에서도 두테르테에 대한 국내 지지율은 80%대다. 행사장에서 만난 로스텀 보디스타 필리핀 국방대 교수는 “국민 열에 아홉은 대통령을 지지한다. 마약 중독자가 300만명인 사회에서 때론 강한 대통령이 필요하다. 외교 정책에 대한 지지도 한 몫한다”고 했다.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건 그의 괴퍅한 대외 언행과 함께 구사되는 외교 정책이다. 두테르테의 지난 1년은 최강 파워 미국과 중국이 부딪치는 서태평양에서 자유롭게(또는 아슬하게) 서핑을 했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탈미친중이라는 큰 흐름속에 미·중을 상대로 현안마다 말(馬)을 바꿔탔다. 그러면서도 미국과의 동맹은 유지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러시아 일본, 인도와의 관계를 강화해왔다. 헤징(hedging·이익을 위해 하나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고 분산)외교, 줄타기 외교라는 평가 속에 두테르테가 정부내 핵심 인사들과는 ‘포스트 미국(Post America)시대를 대비하는 차원’이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필리핀은 16세기 이후 300년 간 스페인 식민지로, 1898년 부터 1946년 완전 독립할 때 까지는 미국의 지배(1941~44년 일본이 점령)를 받았다. 한 세기 이어진 미국 중심 외교의 방향을 두테르테가 튼 것이다.
 
12·13일 아세안회의서 트럼프와 첫 대면
 
탈 미국 행보를 보인 그는 러시아 정상과는 수차례 만났다. [AP=연합뉴스]

탈 미국 행보를 보인 그는 러시아 정상과는 수차례 만났다. [AP=연합뉴스]

취임 후 20여개 나라를 방문한 두테르테는 워싱턴은 찾지 않았다. 워싱턴은 전임자들의 예외없는 취임 후 첫 방문지였다. 그 사이 베이징과 도쿄를 각각 두 차례 찾았고, 모스크바는 필리핀 대통령으로는 처음 국빈자격으로 방문했다. 중국 시진핑 주석에겐 “이데올리기적 흐름에 합류하고 싶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겐 “내가 좋아하는 영웅”이라 불렀다.
 
두테르테와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첫 대면은 트럼프가 미·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12~13일 이뤄진다. 미 정부 고위관계자는 “양국 관계가 여전히 굳건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솔직하고 우호적인 대화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의 합동 훈련을 축소하고 미 군함의 남중국해 자유항행작전 기지 사용을 불허한 두테르테는 특히 중국의 남중국해 영토 공세에 관대했다. 필리핀 대륙붕 수역에서 중국이 군사훈련을 했을 때도 “내가 허용했다”고 감싸 논란을 빚었다. “중국과 전쟁을 해서 이길 힘이 없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리처드 헤이다리안 교수(필리핀 드라 살레 대학)는 “하지만 중국의 팽창에 의구심을 갖는 군부와 의회, 오피니언 리더들이 두테르테의 정책에 제동을 걸고 있다”(포린 어페어즈 4월)고 했다. 필리핀의 군 장성은 거의가 미국 웨스트 포인트 출신이다.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막후에서 축출할 정도로 파워가 막강하다. 군부의 입김이든,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든 두테르테는 미국과의 군사 동맹 기본 틀은 유지하고 협력하며 선을 넘지 않고 있다.
 
두테르테의 외교는 외견상 현재까지는 성공적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미·일·러가 필리핀에 경제·군사적 지원을 하며 껴안고 있다. 서방으로선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한 인권 유린(경철 발표로만 3850명 사망)보다 두테르테가 벌이는 있는 이슬람국가(IS)연계 테러조직 소탕전이 더 중요하다는 측면도 있다. 필리핀은 미국을 중심으로 중국, 호주 등의 군사 지원 아래 말라위를 장악한 마우트 그룹을 완전 소탕했다. 중국과 일본은 말라위 재건 지원도 약속했다.
 
탈 미국 행보를 보인 그는 일본의 정상과는 수차례 만났다. [AP=연합뉴스]

탈 미국 행보를 보인 그는 일본의 정상과는 수차례 만났다. [AP=연합뉴스]

두테르테가 대규모 수행단을 이끌고 해외 순방에 나서 약속 받은 투자 및 지원금은 수백억 달러에 이른다. 지난달 30일 두번째 일본을 방문한 두테르테에게 아베 총리는 1조엔(약 9조9000억원)규모의 지원 계획을 재확인하고 양국 기업이 6조7000억 규모의 투자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북핵 위협 한국의 외교 현실과는 달라
 
지난달 19일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고위인사 포럼에서 사진 촬영에 응한 두테르테 대통령. ‘동남아의 스트롱맨’ 답지 않게 표정은 부드러웠다.

지난달 19일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고위인사 포럼에서 사진 촬영에 응한 두테르테 대통령. ‘동남아의 스트롱맨’ 답지 않게 표정은 부드러웠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도 필리핀의 지정학적, 전략적 가치 때문에 등을 돌리기 보다는 동맹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테르테의 ‘헤징 외교’는 한국 역시 국제 질서의 변화를 전략적 사고로 면밀히 읽고 대비해야 한다는 당위를 던진다. 하지만 필리핀과 한국이 처한 환경이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필리핀은 우선 미국과의 동맹 성립 과정과 배경이 한국과는 다르다. 분단국도 아니고, 북한 핵의 위협을 받는 상황도 아니다. 김 교수는 “필리핀처럼 말을 갈아타는 전략은 안된다”며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미·중과 조율로 협상의 공간을 확보, 북핵을 해결하고 통일의 기반을 쌓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정 외교안보 선임기자 kim.s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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