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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원전 짓는다고 집도 못고치게 하더니 대책없이 백지화"

천지원전이 지어질 계획이었던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 백경서 기자

천지원전이 지어질 계획이었던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 백경서 기자

"천지원전 자리에 다른 대체에너지 단지를 만들든지, 아예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마을 발전이 가능하도록 고시를 해제하든지…. 빨리 결정을 짓고 대책을 세워줘야 할 거 아닌교."
 

경북 영덕군 석리 일대 천지원전 백지화에 주민 반발 거세
2012년 개발사업 예정지로 고시되며 재산권 행사 제한
한수원 이미 전체 부지 18% 가량 매입
지주 38명, 한수원에 "원전 짓기로 한 땅 매입해라" 소송
주민들 "천지원전 백지화도 공론화 과정 거쳐야" 주장
영덕군도 "원전짓기로 하고 받은 380억원, 사용하게 해 달라"

29일 오전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회관. 할머니 7명과 마을 이장이 모여 근심스러운 얼굴로 천지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정부가 신규원전 백지화만 얘기하고 주민 피해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앞서 24일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로드맵' 발표로 천지원전 건설 백지화가 사실상 결정됐다.
 
영덕읍 석리는 인근 노물리, 축산면 경정리 등과 함께 정부가 천지원전을 건설하기로 한 부지다. 2008년 제1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수립하면서 추진됐고, 2015년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건설사업이 확정됐다. 2029년까지 신규 원전 2기를 짓기로 했다. 324만여㎡ 면적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영덕 주민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기 위해 '천지원전 건설준비실'도 마련했다.  
경북 영덕 천지원전 건설부지. [자료 네이버지도]

경북 영덕 천지원전 건설부지. [자료 네이버지도]

김옥순(84) 할머니는 "원전 짓는다고 우리 설득한 뒤에 집도 못 고치게 하고, 펜션하나 못 짓게 하고선 이제 와 그만둔다고 모른척하니까 답답할 노릇"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천지원전 인근은 2012년 전원개발사업 예정구역으로 고시가 지정됐다. 이에 따라 토지 소유주들의 재산권이 제한됐다. 주민들은 건축물 건설뿐만 아니라 토지의 용도 변경이나 집수리까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초반에는 미역 생산업에 피해가 갈 것이라며 원전에 반대하던 주민들도 마을 발전이 제한되자 차라리 원전이 빨리 들어섰으면 했다고 한다.
천지원전이 지어질 계획이었던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 백경서 기자

천지원전이 지어질 계획이었던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 백경서 기자

이척이(87) 할머니는 "대대손손 500년간 이 마을에서 살았다. 삶의 터전을 떠나는 게 어디 쉽겠느냐. 그래도 정부 방침이라길래 따라주기로 했다. 정부에선 금방 이사가야할 것처럼 얘기하니, 농업·어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은 다른 생계거리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또 백지화됐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천지원전건설준비단에 따르면 지금까지 3~4군데 가구만 보상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찬 석리 마을 이장은 "원전 건설사업 추진에 앞장선 주민 일부만 토지매입에 동의해 보상을 받았고, 외부 투자자들은 건설 제한 고시 나오기 전에 펜션 한 채 후딱 짓고 한수원에 팔고 나갔다. 남은 건 진짜 주민들 뿐"이라고 말했다. 한수원은 지난해 7월 매입공고에 들어가 전체 부지 중 18.2%(59만여㎡)를 매입한 상태다.
 
실제 천지원전 건설예정부지 곳곳엔 컨테이너로 급하게 지은 듯한 건물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건축이 완료됐지만 대부분 운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 일대. 컨테이너 형식으로 급하게 지은 펜션이 곳곳에 있다. 백경서 기자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 일대. 컨테이너 형식으로 급하게 지은 펜션이 곳곳에 있다. 백경서 기자

김 이장은 "우리는 원전 찬성도, 반대도 아니다. 원전을 짓지 않을 거라면 빨리 확정을 한 다음에 마을 발전을 불가능하게 했던 고시를 해제하고 그동안 주민들이 행사하지 못한 재산권에 대한 보상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프리랜서 공정식

경북 경주시 양북면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프리랜서 공정식

일부 천지원전 편입 확정부지 지주들은 소송에 나섰다. 지난 7월 산업통상자원부는 지주들에게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에 대한 내용이 담긴 공문을 보냈다. 이에 지주 38명은 "한수원이 원전을 짓기로 한 땅을 모두 매입해야 한다"며 대구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참가한 조혜선 천지원전 지주총연합회 회장은 "천지원전 건설이 탈원전 정책으로 하루아침에 바뀌었는데 시민들이 부담을 떠안게 됐다. 다른 대체 에너지 단지를 짓든지, 정부에서 해결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한수원 측은 "공기업인 한수원은 정부의 원전 정책을 성실히 따를 것"이라며 소송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천지원전 지주들과 석리생존권대책위원회는 30일 국회 앞에서 정부에 보상 대책을 요구하는 집회를 연다. 또 성명서를 통해 "신규원전 전면 백지화에 대한 정책도 신고리 5·6호기처럼 공론화 절차를 거쳐달라"고 촉구할 예정이다.
 
26일 오전 열린 영덕군수 기자회견. [사진 영덕군]

26일 오전 열린 영덕군수 기자회견. [사진 영덕군]

천지원전 건설 백지화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영덕군도 마찬가지다. 일부 사업에 제동이 걸려서다. 영덕군은 천지원선을 건설하기로 하면서 2014년 '발전소 주변 지역에 관한 법률'에 따라 원전자율유치 특별지원금 380억원을 받았다. 지역발전 사업, 공공복지 사업 등에 쓰기로 한 지원금이다. 지난 8월 영덕군은 정부에 지원금의 사용계획을 전달했으나, 정부에서는 법적 검토를 해봐야 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는 게 영덕군의 말이다. 
 
지난 26일 오전 9시 이희진 영덕군수는 기자회견을 열어 지원금 380억원을 사용토록 즉각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 천지원전 고시지역 부지에 대한 적극적인 매입과 이 부지가 신재생에너지·문화관광·공공산업등 국책사업의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방안 제시 마련도 촉구했다.
 
이른 시일 내 천지원전 고시지역 해제절차를 진행해 줄 것도 요구했다. 이 군수는 "지난 7년간 천지원전 추진과정에서 영덕군이 겪은 극심한 사회·경제적 피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미흡하다"고 말했다. 
 
한편 국무조정실·산자부는 지난 2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합동브리핑을 열고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후속 조치 및 에너지전환(탈원전) 로드맵'을 발표했다. 신규 원전 건설 계획(6기)은 백지화하고, 노후 원전의 수명 연장을 금지해 현재 24기인 원전을 2038년까지 14기로 줄인다는 내용이다.

 
영덕=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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