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내 머릿속의 악마

편두통  
『우울의 해부』에서 작가 로버트 버턴이 정의한 편두통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우울한 이 병이 사람들에게서 만들어내는 증상은 알파벳 스물네 개가 여러 언어에서 만들어내는 낱말만큼이나 많다. 증상은 한없이 변칙적이고 기묘하며 다양하다. 프로테우스(그리스 신화에서 변신의 상징으로 꼽히는 신)도 그렇게 변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여자의 사전
지긋지긋한 평생의 고질병.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것에 얽힌 추억을 되새기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엄살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며 슬그머니 고마워하게 된 것.  

 
아침에 눈을 떴다. 익숙한 통증이 오른쪽 머리에 밀려온다. 또 찾아 왔구나, 편두통. 빈도로 익숙해졌다고 아픔에도 적응한 것은 절대 아니다. 편두통은, 어느 병이나 그렇겠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고통이다. 욱신욱신. 머릿속에 심술궂은 악동이 망치를 들고 들어가서 뒷골과 관자놀이가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을 땅땅 두드리는 느낌.  
 
증상도 다채롭다. 어쩔 땐 뇌 한가운데 독약으로 가득 채워진 작은 펌프가 있어 맥박에 맞춰 그 독을 뇌 전체에 쑴풍쑴풍 뿜어내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압력이 높아진 머리가 마침 감기 끝에 남은 기침과 만나는 순간, 눈알이 빠져나올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다시 침대로 고꾸라지고 만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고 잠시 원망을 해본다. 하지만 되짚어보니 전생까지 갈 것도 없고 아마 이틀 전에 마셨던 몇 잔의 술이 남긴 숙취의 꼬리표인 듯 싶다. 오랜 경험상 이번 두통은 48시간은 갈 것 같다. 어떤 진통제를 먹어도 이길 수 없다는 것,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릴없이 기다리는 것밖엔 없다는 걸 안다. 내 머리통을 그물 속에 사로잡은 채 음험하게 웃고 있는 악마 같은 이 편두통은 제가 물러나고 싶을 때만 사라지니까.  
 
어쩔 수 없이 하루종일 침대에 뒹굴면서 이 오래된 통증에 얽힌 추억을 떠올린다. 아마 시작은 이십대 초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극에 달했을 땐 임신을 했을 때였다. 그러니 내겐 아이러니하게도 편두통이 내 청춘과, 희망찬 출발과 출산의 설렘 같은 느낌과 맞물려 있다. 미워할 수 만은 없다는 뜻이다.  
 
처음엔 죽을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플 수가 있나. 눈앞에 실뭉치가 하늘에서 스르륵 내려오는 전조 증상으로 시작해, 한 번 시작되면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고 울렁거리는 속을 가다듬을 수도 없어 몇 번을 까무러칠 뻔 했었다. 이유를 알면 예방이라도 하겠지만, 이 변덕스런 악마는 날이 밝으면 밝아서, 흐리면 흐리기 때문에 등장했다. 도무지 뜬금없고 느닷없었다.
 
그것의 병명이 ‘편두통’이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나는 그래도 좀 안심이 되었다. 편.두.통. 왠지 로맨틱하고 문학적인 병명 같지 않은가. 로마 황제 시저부터 시작해 칸트, 프로이트 같은 위인들이 대표적인 편두통 환자였다는데.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천재의 스토리를 완성하기 위한 상징이었지만 천재가 되지 못한 나에게는 거추장스런 일상의 고통일 뿐임은 오래가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또 하나 더 깨달은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좀더 공감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 편두통이란 것이 특별한 증상도 없고 한 번 지나가면 너무나 멀쩡해지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딱 꾀병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나만의 고통이 있다는 것, 나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이렇게 평생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편두통 때문에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건 기다리면 곧 지나가는 통증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드디어 예정된 시간이 지났다. 내 머릿속 악마가 물러갔다. 뇌 속에 다시 쨍쨍한 햇빛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맑은 정신일 때 편두통을 좀 공부해보자. 음, ‘열정적이고 조숙한 지능과 감수성’이란 달콤한 말이 언뜻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역시 ‘강박적이고 융통성없으며 완벽주의적인 성격, 아주 흥분하기 쉬운 유형’ 같은 특성이 자주 등장한다. 나처럼 편두통과 알레르기가 병행하는 유형에게 권하는 생활방식으로는 “먼지와 꽃가루를 피하고 침대보와 베갯잇을 바꾸고, 고양이를 쫓아내고 기름진 육류나 버터를 바른 토스트 같은 음식을 피하”란다. 결국 내가 가까이하고 있는 모든 걸 멀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둘러 책을 닫았다. 잠시 고민 끝에 선택을 했다. ‘편두통 없이 사는, 금욕적인 식생활과 청결한 환경의 여자’가 되기보다는 그냥 ‘편두통을 친구처럼 여기고 평생을 함께 사는, 그것을 핑계로 좀더 쉬엄쉬엄 살아가는 여자’가 되기로. 편두통아 조금만 살살, 함께 가자.
 
 
이윤정 :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