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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춤이 있는 풍경』

『춤이 있는 풍경』

3년 전까지 살던 동네에 우연히 들렀는데, 기분이 묘했다. 집 앞 상가 건물의 절반쯤이 못 보던 가게였고, 매일 가던 슈퍼마켓도 배열을 싹 바꿔 다른 곳 같았다. 길모퉁이 오래된 손칼국수집만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안심이 됐다.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떠들썩한 맛집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곳이다. 수십 년째 아무런 변화도 없이 칼국수와 수제비만 내지만, 동네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지도 변함이 없다. 

『춤이 있는 풍경』
저자: 강광식 외 605명
출판사: 늘봄
가격: 3만5000원

 
빠르게 변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시대, 변하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도 있다. 10월에 지령 500호를 발간한 월간 ‘춤’지가 딱 그렇다. 1세대 춤평론가 조동화(1922~2014) 선생이 1976년 창간한 국내 최장수 춤 전문지다. 월간문학·샘터·공간 등 500호 이상 발행된 월간지가 더러 있지만, 개인이 발행하는 잡지가 단 한 번의 결간도 없이 41년 8개월을 이어온 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장수 기록보다 숨은 의미는 더욱 빛난다. 70년대만 해도 천하게 여기던 춤을 예술로 끌어올린 주역이기 때문이다. ‘춤평론’ 분야를 개척해 춤을 지성의 영역에 포함시켰고,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끌어들여 다른 예술과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해외의 앞선 트렌드를 제일 먼저 소개한 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춤’지를 처음 보면 놀라게 된다. ‘춤’이라는 제호에서 연상되는 화려한 비주얼과는 정반대라서다. 표지부터 화가들의 정적인 그림이 차지하고, 작은 핸드북 크기에 신국판 흑백의 80년대 문예지식 편집 디자인이 촌스러울 만치 고풍스럽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만나게 되는 단 한 장의 세로쓰기 지면에선 누군가 여행지에서 부친 엽서를 받은 듯 아련한 향수가 전해온다. 손바닥만한 그림과 함께 미술인들이 춤에 대한 짧은 단상을 적어 내린 ‘춤이 있는 풍경’ 칼럼이다.
 
조동화 선생은 1999년 275호부터 세로쓰기를 포기하고 가로쓰기로 바꾸면서 진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는데, 이 칼럼만큼은 천연기념물처럼 세로쓰기를 지키고 있다. 『춤이 있는 풍경』은 창간 때부터 실렸던 500명의 화가·문인들의 칼럼에 무용가들의 축하글 등을 더해 총 605명의 문화예술인들의 글과 그림을 칼럼과 똑같은 세로쓰기 판형으로 엮은 단행본이다.
 
필자들의 면면도 놀랍다. 장욱진·천경자·박서보 등 동·서양화가를 비롯해 조각가 최만린,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등 한국을 대표할만한 미술인들이 백과사전처럼 가나다 순으로 춤에 대한 개인적 기록을 남겼다. 그들이 그려놓은 ‘춤 풍경’ 수백 점도 보물 같은 가치다. 흑백의 작은 그림이지만 각자의 화풍이 오롯이 담긴 내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매년 집에 와 굿을 했다는 애꾸무당에게서 첫 한국춤의 추억을 더듬는 백남준부터 바르셀로나 선술집에서 만난 플라밍고를 추는 여인의 슬픔을 읊조리는 천경자까지, 스타일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춤을 대놓고 예찬하거나 묘사하려는 시도는 분명 아니다. 새벽의 절집에 흔들리는 목어에서(서양화가 최자현),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이 우주의 공간으로 접속하는 순간에서(조각가 이상길) 저마다 춤을 느낄 뿐이다.
 
“춤은 아무 말 말고 그저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더 좋으리라”(화가 구본렬)고 했듯, 춤은 말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을 날을 기다린다”(서양화가 최영림)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어르신의 걸음걸이 속에서 춤의 운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한국화가 최유)고 했듯, 춤은 누구나 추고 싶고 어디에나 있는 것. 고색창연한 ‘춤이 있는 풍경’도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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