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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공감 共感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소설은 중년을 위한 예술인 듯
젊었을 땐 몰랐던 것 깨닫게 해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패배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다. 단어 하나하나에서 잘 조율된 피아노 소리가 나는 기분이다. 혀로 굴리고, 목젖을 떨고, 호흡을 조절하면서, 조곤조곤 소리를 내본다. 입술을 미동하면서, 폐의 뒤쪽에 닿을 때까지, 심장 고동에 이를 때까지, 가만가만 삼켜 본다. 문장은 『남아 있는 나날』에 나온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이다.
 
처음 읽은 것은 스물다섯 살.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루분의 일을 마치고, 어두워지는 창 위로 따스한 불빛이 하나둘 걸린 까닭일까. 일과를 끝낸 자의 충만함과 뿌듯함이 연인과 만남을 기대하는 설렘을 한껏 부풀린 덕분일까. 이야기가 마음의 타자기를 두드렸다. 심인(心印). 흔들리던 마음이 비로소 길잡이를 얻었다.
 
손발이 땀을 흘리고 정신이 곤두선 시절에는 삶의 진짜 즐거움을 알기 어려운 법이다. 경건하고 헌신적으로 시간을 열심히 흘려보낸 후 심신이 저절로 느긋함을 챙길 시절에 이르면, 인생에 비로소 가장 좋은 때가 찾아오리라. ‘지금 이 순간’을 안달과 조바심으로 망치지 말고, 원망과 후회로 헛되이 보내지 말고, 온전히 집중하고 또 사랑할 것.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남아 있는 나날』은 평생 흔들리지 않고 자기 일에 헌신해 온 한 집사의 삶을 그려낸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주인의 뜻을 우선해 살아온 탓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치에 부역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평생을 고수해 온 품위 있는 삶의 가치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위기에 빠진 것이다.
 
“노예 상태에서는 품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껏 표현하고 투표로 의원 나리들을 의사당에 앉혔다 뺐다 할 수 있으니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게 바로 진정한 품위입니다.”
 
신이 아닌 한 후회 없는 인생이 있을 수 있으랴. 자기 삶의 가치에 온전히 집중하고 헌신하고자 했으나, 집사 스티븐스는 잘못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반대쪽은 어떨까. 서로 사랑했으나 고지식한 그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켄턴 역시 다르지 않다. 인간은 누구도 ‘비극적 파토스’를 피할 수 없다.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지요.”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남아 있는 나날』을 다시 읽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은 중년의 예술인 듯하다. 읽는 쪽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작품의 세부는 더 많은 것을 열어 준다. 성급한 밑줄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들리지 않았던 마음의 목소리가 선연히 다가온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패배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부인당하는 위기 속에서 가즈오 이시구로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남아 있는 나날’이 아직 있는 한, 인생이란 행복하다고도, 불행하다고도 말할 수 없나니.
 
스티븐스는 다시 평생을 집사로 헌신해 온 달링턴 홀로 돌아간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더 이상 자유를 모르는 노예가 아니다. 품위란 자유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다. 하지만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집사로서의 삶 역시 완결되지 않았다. 희랍 비극의 대가 코리건은 말한다. “비극의 인물들은 승리하거나 패배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들은 패배 속에서 승리하고 승리 속에서 패배한다.”
 
문학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이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문학은 한 인간의 완결된 삶을 그려 냄으로써, 인생의 좌절이 곧바로 패배로 이어지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빠르게 가르치거나 신속히 배울 수 없다. 그러한 종류의 것들은 대부분, 심각한 좌절이나 패배 속에서만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스티븐스는 자기 인생 전체를 통해서 품위 있는 삶의 정체를 깨달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들을 짐작해 갈 수 있다. 올해의 노벨상 수상 작가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준다. 독서의 계절이다. 한 번쯤 도전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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