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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정부, 여성참정권·고용평등 정착시켜

혁명과 여성
10월혁명에 앞서 러시아의 전제군주제를 전복시킨 2월혁명은 1917년 3월 8일(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론 2월 23일)에 일어났다. 이날 당시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1911년 시작된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거리행진이 벌어졌다. 1908년 미국에서 작업장 화재로 숨진 여성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1909년 열렸던 ‘전국 여성의 날’을 계기로 이듬해 덴마크에서 열린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 제안돼 1911년 시작된 기념일이다. 이날 행사는 최대 공장인 푸틸로프 플랜트의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빵을 달라”며 2월 초부터 계속 벌여왔던 파업시위가 거대한 불꽃으로 확대되는 발화점 역할을 했다. 러시아혁명은 이렇게 여성의 역할로 시작됐다.

페미니스트 운동가 콜론타이 영향
이혼 간소화하고 여성부 만들어
유급 출산휴가 도입, 간통죄 폐지

 
10월혁명으로 들어선 소비에트 정부는 여성참정권과 양성의 고용평등, 동일임금제를 정착시켰다. 유급 출산휴가, 이혼 간소화, 간통죄와 근친혼 폐지 등의 정책을 내놨으며 여성부를 만들었다. 1922년 내전이 끝나고 공산주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건설되면서 공동주택, 공동식당과 함께 공동탁아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2대 여성부 장관을 지낸 페미니스트 운동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사진)의 힘이 컸다. 혁명 전 여성 노동운동과 경제적 자립운동을 벌였던 그는 소비에트 정권에서 양성 간 정치·경제·사회적 평등을 제도화하려고 노력했다. 콜론타이는 남녀 결합이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자유연애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사노동과 자녀 양육을 사회가 맡아 여성의 부담을 정부 차원에서 덜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제도화하는 데 앞장섰다. 성과 연애, 결혼의 문제를 남성이 아닌 여성의 시각에서 접근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콜론타이의 여성해방 주장은 소비에트 정권 내에서 논란을 일으켰으며 ‘마초’ 성향을 보였던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과도 대립했다. 1923년 노르웨이 공사를 시작으로 멕시코 공사와 초대 주스웨덴 대사를 지내는 등 러시아를 떠나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콜론타이는 일제하 조선의 여성 공산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일제 강점기 조선공산당과 중국 팔로군에서 활동하다 해방 뒤 북한 정권에서 최고재판소장 등을 지낸 허정숙(1902~91)은 1920~30년대 콜론타이의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앞장서 ‘조선의 콜론타이’라는 말을 들었다.
 
볼셰비키들이 내세운 정치체제는 비인도적인 공포정치로, 경제체제는 물자 부족 속에 파탄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남성 중심 사회의 시각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양성평등혁명은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서구를 비롯한 진보적 사회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고 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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