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인사이트] 소련 붕괴로 막 내린 러시아혁명 … 4개국 헌법에 흔적으로 남다

혁명의 기억만 어렴풋이 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1917년 11월 7일 당시 페트로그라드로 불리며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동계급 전위론, 민주집중제를 앞세운 볼셰비키(러시아 공산당 및 소련 공산당의 전신)가 2월 혁명으로 정권을 쟁취한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10월 혁명을 이뤘기 때문이다. 100년 전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공산정권을 탄생시킨 10월 혁명의 현장을 찾았다. 러시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자랑하는 국립 에르미타시 미술관을 이루는 5개 건물 중 하나인 겨울궁전이다. 차르의 황궁으로 사용됐던 로코코 양식의 격조 있는 건축물이다. 그곳에 이제 흔적은 사라지고 혁명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았다.

세상 뒤흔든 세기의 혁명 100년
폭정·가난이 도화선 … 무장봉기로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정권 세워
사유재산 부정, 사회주의 경제 실험
구조적인 모순으로 결국 실패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3월(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론 2월), 식량을 비롯한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 민중이 봉기해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렸다. 2월혁명이다. 이후 들어선 임시정부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온건파인 멘셰비키가 주도하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수반을 맡았다. 사회민주노동당의 급진파인 볼셰비키는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그해 4월 망명 중이던 스위스에서 독일 제국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귀국하면서 세력을 불렸다. 레닌은 귀국 6개월 만에 10월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볼셰비키 군사위원장 레온 트로츠키(1879~1940)는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1000명의 적위대가 11월 7일(율리우스력으론 10월 25일) 새벽 2시 임시정부 거점이던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이 ‘성공한 군사 쿠데타’로 혁명 권력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며 급진 계급혁명을 주장하던 볼셰비키에 넘어갔다.
 
대량 숙청과 처형 … 비밀경찰 공포정치
 
로마노프 왕정을 무너뜨린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직후 병사들이 거리를 순찰하고 있다. [중앙포토]

로마노프 왕정을 무너뜨린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직후 병사들이 거리를 순찰하고 있다. [중앙포토]

관련기사
러시아혁명의 바탕에는 가난과 열악한 노동조건, 빈부 격차로 분열된 사회가 자리 잡고 있다. 로마노프 왕조는 개혁을 거부하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려고 인권과 언론, 사상, 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1차대전이라는 국란 속에서 국민의 불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권위와 종교, 그리고 무력에 의존한 가혹한 통치로 민심을 잃었다. 독일 아이히슈타트-잉골슈타트 가톨릭대학의 중동유럽사 담당 레오니트 루크스 교수는 역사잡지인 차이트게시히테에 “2월 혁명 당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빵을 달라’고 외쳤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혁명은 국민의 기본 욕구조차 채워주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전제체제의 모순이 빚은 필연적 결과라는 평가다.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이듬해인 1918년 3월 3일 독일 등 동맹국에 상당한 서부 영토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맺었고 1차대전에서 이탈했다. 이어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치열한 내전을 벌여 볼셰비키의 적군 121만 명, 백군 150만 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잔혹한 상호 살상극과 보복행위, 그리고 이산가족 발생은 시대의 잔혹극이 됐다. 러시아 역사학자 드미트리 볼코고로프는 당시의 잔학상이 “제정 러시아 시대의 비극조차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했을 정도로 지극히 비인간적이었다”고 기술했다.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직후 사회주의 경제의 실험에 들어갔다. 모든 토지와 은행을 국유화하고 공장 운영은 노동자로 구성된 소비에트에 넘겼다. 개인 금융계좌와 교회 재산은 전액 국가가 몰수했다. 대외부채는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노동자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시간은 8시간으로 줄였다. 소련은 사적 소유를 없애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 뒤 중앙계획경제체제를 가동했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대신 모든 사람을 고용하고 평등 분배를 하겠다는 볼셰비키의 공약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하지만 이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눌러 경제를 망치는 요인이 됐다. 집중적인 투자와 노력동원 등으로 소련 경제는 20년대 상당한 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경제를 연구한 헝가리 경제학자 코르나이 야노스에 분석에 따르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경제 원리를 무시하고 무리한 전시성 중공업 투자와 양적 팽창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과도한 군비 지출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이는 74년 뒤인 91년 소련이 무너진 핵심 원인으로 평가된다. 코르나이는 가격통제, 공급자 중심의 경제 등 시장원리를 무시한 중앙계획경제라는 사회주의 경제 방식은 그 구조적인 모순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상점 앞에 선 긴 줄은 소련을 상징하는 풍경이 됐다. 서슬 퍼런 소련의 통제사회도 시장을 이기지는 못했다.
 
소련은 공포정치와 동의어가 됐다. 혁명 직후인 17년 12월 레닌은 체제수호를 위해 비밀경찰인 체카를 창설했다. 시민을 영장 없이 체포·구금·고문·처형하는 공안통치·공포정치는 소련의 특징으로 굳어졌다. 이 조직은 국가정치총국(GPU)-내무인민위원회(NKVD)-국가보안위원회(KGB)로 간판을 바꾸면서 공산독재 유지의 선봉을 맡았다. 소련 붕괴 뒤 KGB의 상당수 기능이 러시아연방보안국(FSB)으로 넘어갔다. NKVD는 스탈린 시절인 37~38년의 피의 대숙청을 주도했다. 공식 통계는 68만 명을 처형했다지만 실제론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2000~2009년 레닌과 스탈린, 트로츠키의 전기를 연이어 출간한 로버트 서비스 영국 옥스퍼드대 명예교수는 “레닌과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혁명의 비윤리적 측면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에 혁명 수출
 
10월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1920년 모스크바의 스베르틀로프 광장에서 대중연설을 하고 있다. 연단 오른쪽 아래는 볼셰비키의 군사지도자 레프 트로츠키. [중앙포토]

10월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1920년 모스크바의 스베르틀로프 광장에서 대중연설을 하고 있다. 연단 오른쪽 아래는 볼셰비키의 군사지도자 레프 트로츠키. [중앙포토]

중요한 것은 소련이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을 통해 중국 등에 조직적으로 혁명을 수출했다는 사실이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 천두슈(陳独秀)·리다자오(李大釗)·마오쩌둥(毛澤東) 등이 코민테른 지도를 받아 창당했다. 초기 혁명 과정은 코민테른이 파견한 파벨 미프가 지도했다. 베트남의 호찌민도 모스크바의 레닌대학 등에서 교육받았다. 10월혁명은 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와 중동으로 퍼졌다. 남북분단과 6·25전쟁이라는 한민족의 비극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이 게릴라 활동 끝에 59년 미주대륙 최초의 공산정권을 세웠다.
 
소련은 2차대전에서 나치의 침략을 물리친 뒤 중·동유럽에 공산위성국가를 세우고 냉전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종주국인 러시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는 사라졌다. 현재 중국·쿠바·베트남·라오스
 
4개국만 헌법에 이를 명문화하고 있을 뿐이다. 일당독재에 세습독재까지 하고 있는 북한은 2009년 헌법에서 ‘공산주의’를 빼고 김일성·김정은의 사상을 앞세워 ‘유사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은 경제는 시장경제, 정치는 일당독재를 추구하는 형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이달 열린 19차 당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조해 주목받았다. 일본의 러시아 문학자 가네야마 이쿠오(龜山邦夫)는 현대사상 10월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허망한 최후를 고려하면 10월혁명으로 세계가 왜 그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지 알 수 없다”고 평가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이기준 기자 ciimccp@joongang.co.kr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