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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송이의 뻔하지 않은 여행글쓰기(5) 상투성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글에 진심 담아야

기자
이송이 사진 이송이
글쓰기. [사진제공=전호성 객원기자]

글쓰기. [사진제공=전호성 객원기자]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상투성입니다." 10여 년 전 어느 소설가의 강연 중에 들었던 말이다. 무한히 동의하게 되는 말이다. 작가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문장만큼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을 만큼, 또 종종 되새기게 될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내 경우 읽다가 덮어버리는 책의 대부분은 어렵거나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이 아니라 상투성에 젖어 ‘그렇고 그런’ 말을 해대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소소하게나마 글이라는 것을 쓰고 때로 남의 글을 편집하며 벌어먹는 사람으로서, 여행 글을 쓰고 있거나 쓰려는 사람에게서 묻어나는 그 언어의 상투성을 통해 그 글의 떡잎을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과연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표현이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표절과 과장, 자극이 난무하는 요즘의 글 세계에서 상투성을 버린 창조적인 언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언어 너머의 진심, 창조성
 
우리는 늘상 그저 그런 표현을 돌려가며 쓴다. 말과 언어를 습득하면서부터, 학교에 다니고 교육을 받고, TV를 보고 책을 읽고, 글짓기를 하고 독후감을 쓰고 일기를 끄적거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디선가 보고 들은 단어와 문장들은 어느새 우리 뇌와 수첩의 한켠에 저도 모르게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다.
 
 
어디선가 보고 들은 단어와 문장들은 어느새 우리 뇌와 수첩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다. [중앙포토]

어디선가 보고 들은 단어와 문장들은 어느새 우리 뇌와 수첩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다. [중앙포토]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 글을 종종 읽어보는 지인은 나의 글을 ‘고즈넉한’ 글이라고 평했다. 글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고즈넉한’ 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는 것이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그 고요하고 마음 편한 분위기를 나는 그저 주구장창 ‘고즈넉하다’라는 표현으로 써버리곤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람을 맞닥뜨렸을 때, 슬픔이나 외로움, 기쁨이나 환희가 찾아올 때, 좌절과 우울이 몰려올 때, 활기차고 즐거울 때, 아프거나 힘이 들 때, 온종일 나른하거나 멍할 때, 온몸에 기운이 넘칠 때, 문득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슴 벅찰 때, 신경질이 나서 미칠 것 같을 때, 가슴이 터질 듯 무언가를 열망할 때, 원망하고 후회할 때, 실망하고 고생스러울 때, 내 머릿속 표현 사전은 상황에 따라 비슷한 단어를 돌려막기 일쑤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수많은 감정이 육신을 에워쌀 때 나는 종종 그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제대로 표현할 말을 찾아내지 못해 난감해 한다. 아마도 인간의 감정이란 언어 그 너머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통을 위해 우리는 겨우겨우, 아니면 너무도 손쉽게 그 감정 하나하나에 언어를 입혀 내고 공식화 시켰다. 
 
그래서일까. 감정이나 생각이 종종 언어를 뱉어냄과 동시에 그 언어에 갇히고 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한 말이, 내가 쓴 글이, 과연 나의 마음이나 사유와 일치하는 것인지 미심쩍을 때가 있다. 그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뱉어놓고 보니 마음이 언어를 따라가기도 한다.
 
 
수많은 색이 얽혀있는 바다는 푸른 바다라는 하나에 단어에 갇혀버리기도 한다. [여수=연합뉴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수많은 색이 얽혀있는 바다는 푸른 바다라는 하나에 단어에 갇혀버리기도 한다. [여수=연합뉴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수많은 색이 얽혀있는 바다의 형언할 수 없는 빛깔이 '푸른 바다'라는 하나의 단어에 갇혀버리기도 하고, 인종에 따라 다르고 사람 하나하나마다 다른 살결의 색이 '살색'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고정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푸른 바다’라고 쓸 때, 그것은 내 진심인가? 내 진짜 마음, 감정, 심정인가? 그저 어디선가 나도 모르게 주워 들은 것은 쓰는 것은 아닌가? ‘푸른 바다’란 과연 나의 언어인가? 가장 먼저 나의 진심, 그것이 가장 창조적인 언어일 것이다.


 
몸으로 쓰는 글이 곧 나의 언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글 쓰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늘 '그렇고 그런' 언어의 감옥에서 헤매는 주제이지만, 나를 포함해서 모두에게 그 상투성의 감옥에서 그만 벗어나기를 애원하고 싶다. 애원이라는 표현이 꽤 적절할 정도로 나는 사실 내 언어의 상투성에 심히 질려 있다. 내가 읽는 글은 둘째고 15년째, 처음엔 낭만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먹고 살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써내고 있는 글들에서 그야말로 지긋지긋할 만큼 ‘그저 그런’ 표현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요즘 우스꽝스러운 줄임말이 유행하고, 감탄사와 문장의 어미 등이 심하리만치 변형되는 것도 상투적인 언어에서 느끼는 대중의 지겨움이 작용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한글의 위상이나 본질을 훼손시키는 무개념한 짓이 아니라 어떻게든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언어를 써보려는, 언중의 발악일수도 있겠다 싶다. 
 
일반 대중도 이렇게 새로운 언어에 목말라 있는데 하물며 대중이 읽어주길 바라는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서야 보다 친절하고 예의 있는 언어의 창조가 절실하다. 따로 부연설명이 곁들여져야 하는 언어 말고 그저 읽으면서 어떤 의미로든 마음속으로 '하~'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게 하는 글을 쓰는 것이 목적임은 물론이다.
 
언어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인격의 발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먼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괜찮은 글을 쓸 수 있고 근사한 사람이 되어야 근사한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먼저의 글에서 재미있는 여행을 해야 재미있는 글이 나올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재미있는 사람에게서 재미없는 말이 나올 수 없고 재미없는 글이 나올 수도 없다.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괜찮은 글을 쓸 수 있다. [중앙포토]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괜찮은 글을 쓸 수 있다. [중앙포토]

 
수줍은 사람에게서 수줍은 글이 나오고 진취적인 사람에게서 진취적인 글이 나올 테다. 전쟁에서는 진취적이었으나 생활에서는 섬세함이 느껴지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우리는 그의 예민함을 느끼고, 겉으론 선비처럼 보이지만 생의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낸 어느 작가의 글에서 문득 그이의 마초적인 기질과 마주한다.
 
내가 아닌 것이 나의 글이 되어 나올 수 없다. 내가 아닌 것을 쓰는 순간, 독자는 신기하게도 기막히게 그 지점을 알아챈다. 말로 하는 거짓말보다 글로 하는 거짓말이 의외로 더 허술하다. 누구에게나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오감이 다른 곳으로 한껏 분산되는 말이라는 수단보다 오로지 문장에만 집중되는 글에서 사람들을 속이기는 외려 쉽지 않다.
 
흠 잡을 데 없는 '친절 메뉴얼'을 따르고 있지만 나의 상황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콜센터 직원의 교과서 같은 말투를 맞닥뜨릴 때마다 뭔지 모를 차가움을 느끼는 것처럼, 잘 다듬어진 정갈하고 깔끔한 글이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글을 마주할 때에도 독자의 마음에는 괜한 피로가 일 것이다. 그러므로 글 쓰는 이의 시선은 끊임없이 안과 밖을 넘나들어야 한다. 안에 천착되어서도 안 되고 밖에만 시선을 빼앗겨서도 안 된다.
 
쓴 사람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글은 뉴스일 때라야만 정당성을 갖는다. 하물며 과거 사회부 기자였던 소설가 김훈 선생은 데모하는 장면을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라도 시위대와 전경이 너나 할 것 없이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우는 것으로 묘사해 짜증나는 시위장면이 아닌 짜장면이 있는 시위를 그려냄으로써 가슴 뻐근한 인간애를 보여줬다.


 
여행글쓰기의 기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기술이 아니다. [중앙포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기술이 아니다. [중앙포토]

 
내일이라도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제의 무언가를 취하고 싶어 하는 독자 앞에서 별 내용도 없는 말을 엄마 잔소리하듯 반복해서 말하는 것 같아 송구하고 민망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어떤 기술이 아니라고 말할 밖에 없다. 여행글도 마찬가지려니와 쓴다는 것은 생각과 발견을 정리하고 묘사와 견해를 구체화시키며 사유와 통찰을 따라 흘러가면서 마음을 녹여내는 일에 다름아니다.
 
사실 풍경이 똑같은 게 아니다. 내가 똑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이거나 똑같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뿐이다. 여행이 비슷한 게 아니다. 비슷한 언어에 갇혔을 뿐이다. '여행글쓰기'에 대해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좋은 식당을 찾는 법이나 버스를 저렴하게 예매하는 법이나 나에게 맞는 숙소를 빠르게 찾는 방법 같은 것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역시 '어떻게' 쓰느냐를 알려줄 수는 없겠다. 아니 알려줄 것이 없다.
 
이 연재에서 글을 기승전결의 순서로 쓰는 것이 요즘에야 더는 매력적이지 않다거나, 묘사를 할 때는 객관적으로 하기보다 최대한 자기만의 경험에 비추어 하라거나, 섬세한 관찰을 습관화하라거나, 글의 처음과 끝맺음에서는 본문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정리하기보다 독자의 마음에 돌을 던지듯 광고카피처럼 임팩트 있게 쓰라거나, 문장은 장문보다는 최대한 단문으로 쓰고 번역투보다는 말하듯이 쓰라거나, 장소나 사람을 이야기할 때 추상적인 단어는 최대한 피하라든가 하는 식의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자세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자 먼저 써 봤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더 큰 상투성으로 몰아넣고 싶지 않다. 아직은 어린 작가가 하는 글쓰기 강좌가 얼마나 얕은 물가인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글의 요점, 뻔하지 않은 글쓰기를 위해 글의 재료가 되는 자신만의 단어와 문장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날마다 새롭게 캐내고 발굴하는 데 시간과 정성을 들여 보라고 말하고 싶다. 읽는 것은 그만하고 써보자. 무엇보다 첫째도, 둘째도, 이제는 읽기보다 써봐야 할(알) 때다.
 
이송이 여행작가·일요신문 여행레저 기자 runaind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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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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