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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5분과 20분 사이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나 지하실 딸린 집이 있는 남자야.”
 

지하실도 생존배낭도 희망 못 줄 만큼 지척인 핵 위협
유일하게 믿을 구석인 동맹국 대통령과의 간극 좁히길

얼마 전 모임에서 누군가 자랑스레 던진 한마디에 좌중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집이 아니라 지하실 얘기에 다들 귀가 쫑긋해진 거다. “그 집 식구들은 핵전쟁이 터져도 살아남을 수 있겠다”면서 너나없이 부러움을 드러냈다. 문제의 지하실에 한 달쯤 버틸 생수와 먹거리, 거기다 무료함을 달래줄 만화책까지 수백 권 갖춰 놨다는 말에 모두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그 정도 준비성이면 혹시나 생존을 꿈꿔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로 말하자면 요즘 ‘필수템’으로 꼽히는 생존배낭조차 살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운 좋게 그걸 메고 지하 주차장이든 지하철역이든 대피한다 치자. 무질서가 판치는 와중에 자칫 완력을 휘두르는 자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빼앗길 공산이 클 듯해서다. 폭탄도 폭탄이지만 전쟁 통의 폭력도 피해야만 살아남지 않겠나. 전용 피란 공간인 그 남자의 지하실이 더욱 탐이 났던 이유다.
 
배낭이고 지하실이고 죄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 건 며칠 전 공개된 국방연구원 보고서를 접하고 나서다. 북한이 서울 도심을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하면 폭발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5분. 우리 군이 제때 탐지해 제대로 경보를 울린다 해도 대피 시간은 길어야 3~4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누구나 예상하듯 실제론 그보다 짧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과연 그 틈에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피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품어 보기엔 북한이 너무 지척에 있다.
 
알래스카와 함께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 땅인 하와이는 어떨까. 핵미사일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7000㎞를 날아가는 데는 대략 20분이 걸린단다. 북한이 지난 7월 4일 최초로 하와이를 타격할 수 있는 ‘화성-14형’ 미사일을 쏘아올리자 주 정부가 서둘러 내놓은 핵 공격 대비 매뉴얼은 이랬다. 발사 5분 내 탐지→10분 내 경보 발령→20분 내 대피 완료! 그곳 주민은 이 시간도 짧다 하겠지만 솔직히 우리로선 그마저 부러운 심경이다.
 
어쩌면 그 5분과 20분의 차이가 전쟁에 대한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심리적 간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대통령이 “전쟁은 절대 안 된다”고 누누이 외칠 때 미 대통령은 담대하게 군사적 옵션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은 거다. 소설가 한강이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 속 몇몇 대목이 이런저런 논란을 낳긴 했지만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한없이 가벼운 도널드 트럼프의 언사를 볼 때마다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요”라고 외치고 싶기 때문이다.
 
한 달 앞서 뉴욕타임스엔 평화를 염원하는 베트남 작가 바오닌의 칼럼이 실렸다. 베트남전 당시 겨우 17세에 북베트남 인민해방군에 자원 입대했던 작가는 정찰 중 목격했던 또래 미군 병사의 얼굴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불과 500m 앞에 중무장한 적이 매복 중인 것도 모른 채 흡사 친구 집에 놀러가듯 콜라 깡통을 발로 차며 걸어가던 천진한 모습 말이다. 잠시 후 요란하게 울린 총소리로 그의 죽음을 짐작했다는 그는 30년이 지나 처음으로 미국에 가서 어린 학생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 소년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단다. 비록 적군이었지만 낯선 땅에서 총알받이가 돼 버린 수많은 젊은이들의 덧없는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는 거다.
 
이 칼럼에서 바오닌은 위정자들이 섣불리 벌인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양쪽의 민초들이란 사실을 잊지 말기를,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실수와 아픔이 반복될 것임을 경고한다. 아마 한강도 이런 얘기를 하려 했던 게 아닐까. 어차피 북한 독재자는 막무가내이니 그나마 말이 통하는 동맹국 대통령에게 간곡히 호소하고 싶었을 게다. 부디 다음달 트럼프의 방한이 위정자와 민초 사이, 그리고 5분과 20분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는 깨달음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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