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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사랑, 여행 사랑 … 전생에 난 집시 여인”

에스닉 스타일을 좋아하는 루비나 디자이너는 이번 전시에서 형형색색의 에스닉 무드의 천을 전등갓으로 씌워 거대한 빛의 터널을 만들었다.

에스닉 스타일을 좋아하는 루비나 디자이너는 이번 전시에서 형형색색의 에스닉 무드의 천을 전등갓으로 씌워 거대한 빛의 터널을 만들었다.

서울디자인재단이 선정한 2018 SS헤라서울패션위크의 명예 디자이너는 루비나(69)다. 1980년 3월 서울 제일백화점 지하에 조그만 의상실을 연 게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시작이었으니, 벌써 38년째다.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한 길만 걸어왔음에도 그는 “남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늘 두 배로 공부하고 노력해야 했다”며 “아직도 부족한 게 많다”고 손사래를 쳤다.

2018 SS 헤라서울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 루비나

 
사실 그는 디자이너 이전에 톱 모델이었다. 또 음반을 두 장이나 낸 인기 가수였고, 거장 신상옥 감독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으로 활약한 배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화려함을 뒤로 하고 그는 패션 디자이너의 삶을 택했다. “화려함보다 후회하지 않을 길을 골랐다”고 그는 말한다.
 
패션 인생을 반추하는 전시 ‘끝없는 여행(Endless Journey)’(10월 17일~11월 12일 DDP 배움터 디자인 둘레길) 준비로 한창이던 13일 오후, 전시 현장에서 중앙SUNDAY S매거진이 그를 만났다. “철사를 손으로 꼬아 전등갓을 만드느라 손이 여기저기 찔리고 거칠어졌다”고 말했지만,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드레스와 실패가 수백 개의 줄로 연결된 전시 작품. 한 올의 실에서 출발한 디자이너의 꿈이 아름다운 드레스로 형상화되는 모습을 표현했다.

드레스와 실패가 수백 개의 줄로 연결된 전시 작품. 한 올의 실에서 출발한 디자이너의 꿈이 아름다운 드레스로 형상화되는 모습을 표현했다.

전시장 초입에는 루비나 디자이너의 다양한 텍스처 의상과 박선희 교수의 일러스트로 꾸민 박효정 작가의 아트 월이 설치돼 있다.

전시장 초입에는 루비나 디자이너의 다양한 텍스처 의상과 박선희 교수의 일러스트로 꾸민 박효정 작가의 아트 월이 설치돼 있다.

  
전시장 초입에는 박효정 작가가 꾸민 거대한 아트 월(art wall)이 세워져 있다. 색색의 낡은 합판으로 짠 크고 작은 액자 속에는 ‘디테일의 여왕’이라 불리는 디자이너 루비나의 다양한 텍스처 의상과 박선희 이화여대 교수(섬유예술과)의 일러스트가 들어 있다.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감각적 콜라보레이션이다.
 
이어지는 코너에선 한 벌의 드레스에서 시작된 수백 개의 띠가 수백 개의 실패와 연결되는 장관이 펼쳐진다. 한 가닥 실에서 시작된 디자이너의 꿈이 한 벌의 드레스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둘레길을 따라 이어지는 다른 코너들도 옷 입은 마네킹을 연달아 전시해 놓은 여느 패션 전시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직접 니트를 짜기 위해 1980년대부터 공장을 만들고 들여놨다는 낡은 니트 직조 기계가 보이는가 하면, 색색의 수많은 원단들로 전등갓을 만들어 씌운 거대한 빛의 터널도 보인다. 옷은 보이지 않고 대신 수십 년은 족히 돼 보이는 낡은 바디들만이 관람객을 맞기도 한다. 수천 번의 핀 자국과 테이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바디의 오래된 상처들은 디자이너가 숱하게 지새운 나날의 흔적이다.
 
전시를 기획한 서영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선생님의 옷을 보면 달다/엮다/뜨다/묶다/꼬다/꿰매다/물들이다/덧붙이다 등 온갖 섬세한 손동작을 다 떠올리게 된다”며 150벌이 넘는 의상과 설치미술의 조화를 꾀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기술과 소재를 접목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온 창의성과 노력의 결과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며 “지구 곳곳을 여행하며 체득한 이국적 미감을 시그니처인 에스닉 룩으로 표현해온 보헤미안 기질 역시 잘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검은 비닐봉지를 소재로 제작했던 아트 워크. 사진 이건호(패션 북 『끝없는 여행』)

검은 비닐봉지를 소재로 제작했던 아트 워크. 사진 이건호(패션 북 『끝없는 여행』)

  
전시를 하는 소감은.
“이런 전시를 할 줄 알았더라면 아카이브를 더 충실히 준비해뒀을 텐데,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하고 앞으로만 달려온 게 아쉽다. 외국의 유명 패션 하우스들이 자신들의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우리도 이제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전시장에 옷이 꽤 많다.
“시즌마다 몇 벌씩 남겨 보관했던 옷들이 큰 몫을 했다. 또 고객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250벌이나 소장하고 있는 분도 계셨다. 그나마 ‘예쁜 옷은 자주 입어 헤지고 낡아서 버리고, 덜 예쁜 옷만 남겨둔 것’이라고 하더라(웃음). 옛 기억을 살려 새로 만든 옷도 제법 있다. 함께 출간한 패션북은 14개 섹션으로 구성했는데, 사진가 구본창·한홍일·이건호·조선희·어상선·홍장현·김재원·목정욱·김석준·조기석 등과 함께했다.”  
 
여성복 ‘루비나’를 정의한다면. 
“실루엣이 직사각형에 가까운 길고 슬림한 옷, 입었을 때 편안하고 세련돼 보이는 옷, 그 사람의 무드를 잘 표현해주는 옷. 개인적으로 직사각형을 좋아한다. 안정적이고 익숙해 보이기 때문이다. 옷은 사람을 보여주는 도구다. 그래서 강렬한 포인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디테일이 유난히 많은 것도 특징이다.”  
 
전시 제목 ‘끝없는 여행’의 의미는.
“인생이란 결국 여행 아닌가. 매번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성숙된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여행의 목적은 패션 디자이너의 숙명과도 닮았다.”  
기하학적 실루엣을 살린 작품. 사진 목정욱(패션 북『 끝없는 여행』)

기하학적 실루엣을 살린 작품. 사진 목정욱(패션 북『 끝없는 여행』)

‘한국의 소니아 리켈’로도 불리는 루비나 디자이너의 트레이드 마크인 니트 작품을 클로즈업 했다. 사진 어상선(패션 북『 끝없는 여행』)

‘한국의 소니아 리켈’로도 불리는 루비나 디자이너의 트레이드 마크인 니트 작품을 클로즈업 했다. 사진 어상선(패션 북『 끝없는 여행』)

 
‘인생 자체가 긴 여행’이라는 그의 말은 변신을 거듭하며 살았던 실제 삶과도 어울린다. 169cm의 늘씬한 키에 서구적인 마스크.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하면 누구나 새빨간 보석 루비를 먼저 떠올리며 예명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루비나’는 어릴 적 받은 가톨릭 세례명(본명 박상숙)으로, 천사의 이름 중 하나다.

 
전남 순천에서 나서 순천여중을 졸업했다. 중학교 때부터 고전무용을 익혀 서울예고·숙명여대 무용학과를 졸업했지만, 운명처럼 그를 끌어당긴 건 ‘모델’의 세계였다. 잡지 『여학생』촬영을 위해 서울예고를 방문한 사진가는 원래 추천받았던 학생 대신 표지 모델로 그를 발탁했다.
 
“겨울방학 때였는데, 잡지가 나오고 전국에서 연애편지 수백 통이 날아왔다. 주말이면 이모님이 하숙을 치던 집으로 놀러갔는데, 그때마다 하숙생의 친구들이라는 인근 경복고 학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더라.”(웃음)
 
대학 때 우연히 친구와 들렀던 의상실 ‘석경’에서 평생의 멘토인 이화여대 명예교수이자 패션 디자이너였던 고 배천범 교수를 만났다. 배 교수의 옷을 입고 여성지 화보를 촬영한 것이 패션 모델로서의 시작이었다. 요즘 말로 ‘길거리 캐스팅’도 숱하게 당했지만 학교가 외부활동을 허락하지 않는 터라 졸업 후부터 본격적으로 모델 일을 시작했다.
 
그에게는 타고난 재주가 여럿 있었다. ‘예쁜 모델이 통기타도 잘 친다더라’ 소문에 MBC 예능프로그램 PD가 찾아와 노래를 한 번 들어보더니, 나흘 뒤 당시 신인가수 등용 프로그램인 ‘데뷔 스테이지’에 출연시켰다. ‘눈이 나리네’ ‘고엽’ 같은 샹송은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잘 어울렸고, 이후 4년간 음반을 2개나 발표하며 가수로도 사랑받았다.
 
“방송에서 담배 피우며 노래 했던 가수는 제가 유일했을 거다. 그게 어른들 눈에는 언짢게 보였나 보다. 그 어른들 중 한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TV에서 제 모습을 본 그 분이 MBC 사장에게 전화를 했고, 그 다음날 바로 MBC 출연정지를 당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외국 잡지를 보며 유럽 스타일로 꾸민 아파트 인테리어가 소문나면서 배 교수의 소개로 영화 촬영팀에게 잠시 빌려준 적도 있었다. 촬영장으로 변한 자신의 집을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던 그를 신상옥 감독이 보더니 다음날 시나리오를 보냈다. 그렇게 ‘여형사 마리’의 주연 배우가 됐다.  
몸에 꼭 붙는 드레스 안에 낙하산을 숨겨 두었던 에너제틱 수트. 사진 홍장현(패션 북『 끝없는 여행』)

몸에 꼭 붙는 드레스 안에 낙하산을 숨겨 두었던 에너제틱 수트. 사진 홍장현(패션 북『 끝없는 여행』)

루비나가 여행을 즐기는 이유는 이국적인 풍경의 에스닉 스타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로코(왼쪽)와 중국 묘족의 주거지를 방문한 후 만들었던 의상들. 사진 최기석(왼쪽)·조선희(패션 북『 끝없는 여행』)

루비나가 여행을 즐기는 이유는 이국적인 풍경의 에스닉 스타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로코(왼쪽)와 중국 묘족의 주거지를 방문한 후 만들었던 의상들. 사진 최기석(왼쪽)·조선희(패션 북『 끝없는 여행』)

 
영화 섭외는 더 들어오지 않았나.
“내가 다 거절했다. 홍콩·부산을 옮겨다니며 밤 새워 촬영하는 일이 너무 고단했다. 연기가 내 성향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모델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게 즐겁게 사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지금도 눈에 띄는 미인인데, 당시에는 더 주목받았겠다.
“혼혈이라는 소문도 있었다.(웃음) 모델 시절에는 과감한 옷차림을 즐겼다. 한여름에 허벅지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오렌지색 터번을 머리에 감고 반도 조선호텔에서 양담배를 피고 있으면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양담배를 피면 위법인 시절이었는데, 그때 내가 “what?”한 마디 하면 경찰들이 그냥 돌아갔다. 외국인인 줄 알고.(웃음) 다 한때의 치기였다.”  
 
‘모델’ 루비나는 어땠나.
“당시는 디자이너들이 옷만 준비했고, 스타일리스트도 없던 때였다. 액세서리는 모델들이 직접 준비해야했다. 나는 트렁크에 액세서리를 꽉 채워 갖고 다니면서 다른 모델들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반지를 열 손가락에 끼고 다닐 만큼 좋아했고, 잡지나 광고의 손 모델을 할 만큼 손도 예뻤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되고부터는 반지를 끼지 않는다. 원단을 만지고 패턴을 뜨느라 손이 다 망가져서 미워졌다. 하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다.” 
 
액세서리를 전혀 하지 않는 이유는.
“모델 그만두고 패션 디자이너로 작업실에 파묻혀 살다 보니 성격도 변한 것 같다. 언제부턴가 나를 꾸미고 치장하는 일이 부끄러워지더라. 반지·목걸이는커녕 모자도 잘 못 쓴다. 팔이 까맣고 기니까 여름에 팔찌 정도만 할 뿐이다. 뭔가 하나에 집중하면 하루 종일 문 밖도 나서지 않는다. 그런 날이 늘다 보니 지인들은 ‘참 재미없는 사람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완전히 다른 인생 2막을 사는 느낌이랄까.”  
 
인기 정상의 톱 모델, 가수, 배우라는 타이틀을 놓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오만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정상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 시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뭘까, 평생 하고 싶은 일이 뭘까 고민해보니 옷 만드는 일이더라. 의상실을 처음 내고 2년 후 패션쇼를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갑자기 겁이 났다. 그리고 모르는 게 하나씩 생겼다. 남들보다 늦게, 준비 없이 시작한 일이니 두 배로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자랑할 게 별로 없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점은 자부할 수 있다.”
 
전시 공간 중 가장 큰 게 ‘에스닉 룸’이다. 여행을 좋아하나.
“옷 좋아하고 여행 좋아하는 걸 보면 난 전생에 분명 ‘집시’였을 거다.(웃음) 매 시즌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아프리카와 네팔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그곳 여인들의 옷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낡고 헤진 것을 대충 걸쳐 입은 것 같은데, 우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색감의 조화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은 여행의 묘미이자 디자이너의 행복이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어디로 갈 건가.
“프라하로 가볼까 한다. 나는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보다 프라하의 오래된 골목들이 더 좋다. 골목마다 ‘손맛’이 숨어 있다. 작은 앤티크 숍, 뮤지엄도 들르고 맥주도 한 잔 마시면서(웃음) 에너지를 충전해야겠다.”  
 
무엇을 위한 에너지인가.
“이번 전시는 내게 긴 여행의 쉼표와 같았다. 그동안 ‘대충대충 했구나’ 하는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앞으로는 정말 멋스러운 옷을 만들어야겠다고 반성했다. ‘이게 팔릴까’하며 나와 타협하지 않고, 진짜 ‘손맛’이 살아 있는 옷을 만들겠다.”  
 
인생의 계획이 있다면.
“디테일 북을 만들고 싶다. 후학들을 위해 대한민국 패션도 이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왔다는 걸 보여주고 또 내 노하우를 가르쳐주고 싶다.”
 
당신에게 ‘패션’은 무엇인가.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세계다. 항상 새로운 걸 담아내려 노력하는데도 쇼를 치르고 나면 만족감보다 또 다른 도전의 영역이 보인다. 나이 든 디자이너로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항상 스스로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즐겁게 길을 가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다.”  
 
 
글 이미정 프리랜서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루비나 패션 북 『끝없는 여행(Endless 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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