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장제스가 편성한 신4군, 홍군 출신 샹잉이 실질적 지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51>
중앙 소비에트 군사위원회 주석 시절, 부주석 마오쩌둥(오른쪽 둘째), 주더(왼쪽 셋째) 등과 함께한 샹잉(오른쪽 셋째). 왼쪽 둘째는 런비스(任弼時). 오른쪽 첫째는 장원텐(張聞天). 1931년 11월, 장시성 루이진(瑞金).

중앙 소비에트 군사위원회 주석 시절, 부주석 마오쩌둥(오른쪽 둘째), 주더(왼쪽 셋째) 등과 함께한 샹잉(오른쪽 셋째). 왼쪽 둘째는 런비스(任弼時). 오른쪽 첫째는 장원텐(張聞天). 1931년 11월, 장시성 루이진(瑞金).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중국 공안부가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반도(叛徒) 색출이 목적이었다. 전국의 공안계통이 총동원됐다. 가가호호를 직접 방문했다. 수상한 사람이 발견되면, 과거를 이 잡듯이 뒤졌다.

중앙혁명군사위 주석 시절 샹잉
장정 때 “홍군 엄호하겠다”며 잔류

 
장시(江西)성 신위(新余)현 공안국 부국장은 소문난 공처가였다. 하루는 부인 심부름 나갔다가 소금가게에서 호구조사 마치고 나오는 부하와 마주쳤다. 수고한다며 잡담 나누던 중 가게 안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부하와 눈인사 나누더니 자전거 몰고 유유히 사라졌다.
 
부국장은 어디서 본 사람 같았다. 부하에게 소금가게 점원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어디서 봤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소금가게 주인을 불렀다. “방금 전에 나간 사람 인상이 좋다. 이곳 사람이냐”며 능청을 떨었다. 현지인이 아니라는 말을 듣자 부쩍 의심이 들었다.
 
공안국으로 돌아온 부국장은 여전히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 생각이 안 났을 뿐, 낯익은 사람은 분명했다. 화장실에 소변보러 갔는데 머리에서 뭔가 번쩍했다. 국장실로 달려갔다. “류허우총(劉厚總·유후총)을 발견했다. 소금가게 점원이다. 겉모습은 변했지만 얼굴이나 체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틀림없다.”
 
국장의 얼굴이 벌게졌다.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당장 체포해서 심문해라. 도망가지 못하게 주변을 포위해라.” 류허우총은 12년 전, 신4군(新四軍) 부군장(副軍長) 샹잉(項英·항영)과 부참모장 저우즈쿤(周子昆·주자곤)을 쏴 죽인 후, 군자금을 훔쳐 달아난 반역자였다. 부국장과 국장은 신4군 출신이었다. 샹잉은 신4군의 영혼이나 다름없었다.
 
해 질 무렵, 류허우총이 소금가게에 있는 것을 확인한 사복 공안요원들이 가게 주변을 에워쌌다. 이튿날 새벽, 부국장이 소금가게 문을 두드렸다. 점원이 문을 열자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류 부관(副官), 이게 얼마 만인가? 그간 잘 지냈나?” 점원도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나는 류 부관이 아니다. 사람 잘못 봤다.” 부국장의 목청이 커졌다. “류허우총! 나를 자세히 봐라. 누군지 모르겠느냐? 저우 부참모장의 경호원이었던 나를 기억 못하느냐?” 점원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중공 화동국(華東局) 서기와 상하이 시장을 겸하던 천이(陳毅·진의)도 한때 샹잉의 부하였다. 류허우총 체포소식을 듣자 신위현 공안국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수고했다. 우리 모두 죽어서 샹잉 앞에 나갈 자격이 생겼다. 샹잉 암살범에게 심문은 필요 없다. 재판도 시간 낭비다. 극악한 놈이다. 당장 총살시켜라.”
 
샹잉은 열다섯 살 때 방직공장에 심부름꾼으로 취직했다. 박봉이다 보니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하루 두 끼 먹으면 잘 먹는 날이었다. 3년 후, 정식 직공이 됐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레닌이라는 사람이 혁명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고 마음이 들떴다. 파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철도 파업 등 대형 노동운동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중공은 샹잉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3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상무위원에 연달아 당선됐다. 경력도 다채로웠다. 1차 국·공합작 파열 후에는 징강산(井岡山) 중앙혁명 근거지로 이동,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했다. 부주석은 마오쩌둥과 주더(朱德·주덕)였다.
 
1939년 2월, 신4군 사령부를 방문한 저우언라이(가운데) . 왼쪽이 샹잉, 오른쪽이 예팅.

1939년 2월, 신4군 사령부를 방문한 저우언라이(가운데) . 왼쪽이 샹잉, 오른쪽이 예팅.

1934년 10월 장정(長征)이 시작됐다. 샹잉은 잔류를 희망했다. “국민당 군과 유격전 펼치며, 장정에 나선 홍군 주력을 엄호하겠다.” 장정 도중 당권과 군권을 장악한 마오쩌둥은 옌안에 안착하자 3년간 적지에서 유격전 펼친 샹잉의 공로를 극찬했다. “샹잉 동지는 남방의 홍군과 유격대를 이끌고 3년간 피와 땀을 흘렸다. 국민당 군의 계속되는 추격을 뿌리치며 우리의 역량을 과시했다. 우리는 샹잉 동지의 정신을 철저히 배워야 한다.”
 
샹잉의 응답도 겸허했다. “우리는 혁명가다.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마오쩌둥이나 주더,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를 봐라. 그간 열 번은 죽었어야 될 사람들이다. 개인의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 죽음도 혁명의 한 부분이다. 아무도 우리를 정복할 수 없다. 죽으면 죽을수록 소생능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중국이 망할 수 없는 것처럼, 중국 혁명도 멸망할 수 없다.”
 
신4군 견장. [사진 김명호 제공]

신4군 견장. [사진 김명호 제공]

1937년 9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공산당과 함께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샹잉이 이끌던 남방 8개 성(省)의 홍군 유격대를 중심으로 신4군을 편성했다. 지휘는 북벌명장 예팅(葉挺·엽정)에게 맡겼다.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총애를 받던 예팅은 초기 중공당원이었다. 광저우(廣州)폭동 실패 후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질책을 받자 당을 떠난 강골이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당은 떠났지만 당을 배신한 적이 없는 예팅을 마다하지 않았다. 샹잉을 부군장에 임명하는 조건으로 예팅 임명에 동의했다. 중공은 부군장 샹잉을 중공 신4군 지부 당 서기에 임명했다.
 
예팅과 샹잉은 성격이나 생활방식이 정반대였다.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계속>
 
 
김명호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