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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세밀화

성석제 소설
파리시 박물관에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 몇 점이 걸려 있다. 그중에서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장면을 담은 그림은 가히 압도적인 힘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루이 16세와 왕비 앙투아네트
처형 장면 그린 세밀화 참혹

숙종 비 민씨 폐위 반대 박태보
혹독한 국문받아 비참하게 죽어

평화혁명이란 그만큼 어렵고 희귀
촛불 땐 유혈커녕 쓰레기도 안 남아

‘태양왕’ 루이 14세의 5대손인 루이 16세는 선량하고 무능한 인물로 당대 프랑스 사회의 제도적 모순과 재정위기가 심각했는데도 귀족 등 특권층의 저항으로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 1789년 7월 14일 시민이 봉기해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역사적인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1792년 9월 프랑스의 민중에 의해 공화제가 수립되고 왕정은 폐지되었다.
 
1793년 1월 21일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16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단두대 앞에 선 루이 16세의 마지막 말은 “국민들이여, 나는 억울하게 죽는다”는 것이었지만 이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루이 16세가 기요틴에 의해 처형되는 장면을 그린 그림 한켠에는 루이 16세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참수 장면을 참관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게 보인다. 화가의 시선에는 일말의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녀 출신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같은 해 10월 16일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당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을 다루고 있는 그림에는 군중 맨 앞쪽에 수십 명의 여성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 그중 몇몇은 다가올 추운 계절을 대비해서인지 뜨개질을 하고 있다. 사형 집행관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린 머리를 들어 보이는 순간 단두대에 걸쳐져 있는 몸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고 피를 받을 양동이도 준비되어 있는 게 보인다.
 
그로부터 백여년 전 조선에서도 한 왕비의 운명이 갈리고 있었다. 1689년(숙종 15년) 4월 25일(음력) 저녁에 왕비 민씨의 폐위에 반대하는 파산관(罷散官·실직에서 물러나 산계만 있는 전직 관리) 86인의 연명 상소가 승정원에 들어갔다. 임금이 이 상소를 읽다 말고 진노하여 손으로 상소문을 쳐서 종이가 찢어지기까지 했다.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승지에게 한 말은 이러했다.
 
“저희들이 기필코 부인(婦人·왕비를 가리킴)을 위하여 절의를 세우려고 하여 내가 참소를 듣고 무죄한 사람을 폐출하려 한다고 하니, 과연 이럴 수가 있는가? 차라리 나를 폐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어 인정전 문 앞에 임금이 친히 국문할 형구를 설치하게 하고 소를 올린 사람들 가운데 주요한 사람을 잡아들이게 했다. 비가 내려 음산한 날씨였다. 전 사직 오두인과 전 판서 이세화, 유헌에 이어 상소문을 대표 집필한 전 응교 박태보가 잡혀 들어갔다. 삼경이 훨씬 넘어 친국이 시작되었다.
 
박태보는 혹독한 장형을 받으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독물’이라 하여 장으로 입을 치라는 명까지 떨어졌다. 본격적인 형문이 시작되어 세 차례의 장형에 이어 압슬(壓膝)이 가해졌다.
 
먼저 땅에 널을 깔고 사금파리 두 섬을 부은 뒤에 사금파리 위에 박태보의 두 다리를 얹게 했다. 다리 위에 사금파리 두 섬을 붓고 그 위에 널을 얹은 뒤에 그 널 위로 세 사람의 나장이 올라가서 일시에 뛰기를 열세 번 하면 한 차례의 형벌이 끝났다. 널 속에서 사금파리와 뼈가 부딪쳐 깨지는 소리가 났고 두 차례의 형벌에 나장이 울면서 뛰었다.
 
가장 엄중한 형벌인 낙형이 시작된 것은 날이 새고 난 뒤였다. 숯 두 섬을 가지고 와서 불을 피우고 두 손 너비만한 넓적한 쇠 둘을 불에 넣어 달구어서 몸을 지지는 데 썼다. 큰 나무로 기둥을 세운 뒤에 박태보의 엄지발가락을 노끈으로 동여매어 거꾸로 매달았으며 낙형을 가할 때에 벌건 기름이 끓고 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낙형을 열세 번 하는 것이 한 차례인데 두 차례에 걸쳐 형을 받았고 온몸을 지지는 것이 법에 어긋난다 한 뒤로는 발바닥을 지졌다. 해가 떠서 박태보의 모습이 분명히 드러났는데 기름과 피가 끓고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타서 형용이 극히 참혹했다. 누린 냄새에 메스꺼워진 임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중 별감에게 살펴보게 하고는 아직 살았다 하자 내병조에 내려서 다시 형을 가하게 했다. 그곳에서 마침내 무릎뼈가 부서지고 골수가 샘처럼 솟아 나왔다.
 
박태보가 들것에 태워져서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하늘이 감동할 충신이라 하며 약봉지를 던지고 재물을 전했다. 박태보는 명례방의 집에 잠시 들렀다가 곧 귀양을 떠나야 했는데 박태보를 태운 교자가 나오자 길가에 있던 노인들이 갓을 벗어던지고 앞을 다투어 채를 잡았다. “이분이 타신 틀을 맨다는 것은 진실로 영광된 일이다” 하면서 서로 바꾸어 메고 극력으로 보호하여 갔다.
 
박태보는 금부도사에 이끌려 조금씩 길을 가서 5월 1일 한강을 건넜고 노량에 이르렀다. 온몸이 참혹하게 붓고 고통이 극심하여 침으로 화독을 다스리고 뼈에 박힌 사금파리를 빼냈다. 5월 3일 박태보가 목숨을 걸고 간한 보람도 없이 왕비가 폐출되었다. 5월 5일 아버지 박세당이 “네가 이제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조용히 죽음으로써 마지막을 빛나게 하라”고 당부하자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하고 공손히 답했다. 박세당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눈물을 흘리고 부르짖으며 울었다. “이제 흙이 나를 부르는구나” 하는 말을 남기고 35세의 박태보가 운명했다.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의 세밀화는 이처럼 참혹하고 비정하며 가히 폭력적이라 할 만한 풍경을 보여준다. 평화로운 혁명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고 희귀하기까지 하다. 지난해 10월 29일 이 땅의 광장 한구석에서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첫 촛불집회부터 이듬해 4월 29일 23차 집회까지 총 1684만 8000명(집회 주최 측 추산)이 참석했다. 촛불의 물결이 지나간 자리에 유혈이 낭자하기는커녕 쓰레기조차 남지 않았다.
 
 
※‘성석제 소설’은 성석제씨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실험적 칼럼으로 4주마다 연재됩니다.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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