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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 장례식 2년2개월이나 연기, 분노와 자각, 근대적 ‘민국’ 의지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9> 조선중화론과 ‘國喪 정치’
분노와 자각, 근대적 ‘민국’ 의지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려 2년2개월이 지나서야 열린 명성황후 장례식. 대한제국 선포 후 첫 공식 행사였다. 황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백성들의 분노와 자각이 어우러졌다. 이틀간 성대하게 열렸다. 상여를 따라가는 수행원만 4800여 명. 사진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의 한 장면. [중앙포토]

무려 2년2개월이 지나서야 열린 명성황후 장례식. 대한제국 선포 후 첫 공식 행사였다. 황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백성들의 분노와 자각이 어우러졌다. 이틀간 성대하게 열렸다. 상여를 따라가는 수행원만 4800여 명. 사진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의 한 장면. [중앙포토]

대한제국(1897. 10. 12~1910. 8. 29) 창건 직후의 첫 주요 행사는 명성황후 장례식이었다. 1897년 11월 22일 장례가 거행됐으니 황후 시해(을미왜변·1895. 10. 8) 후 무려 2년2개월 만이다. 왕실의 장례는 대개 3개월을 넘지 않았다. 예외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1895년 10월 8일 일본군 만행 후
을미의병 폭발 … 아관망명 성공

백범의 일본군 살해도 “국모 복수”
안중근의 이토 사살도 “황후 복수”
제국 선포 직후 황제가 장례 지휘

위정척사파 명망가는 “칭제 반대”
무명의 다수 지방 유생 “칭제 요청”
고종과 힘 합쳐 대한제국 창건

 
1898년 1월 9일자 미국 신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황후의 장례식 기사가 실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존경을 표했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기고했다.
 
장례식은 이틀에 걸쳐 성대하게 치러졌다. 궁궐에서부터 장지인 동대문 밖 홍릉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장례 행렬을 스케치한 헐버트는 “황제가 하관과 봉분 작업을 직접 지휘했고, 모든 일이 끝난 뒤 황제와 황태자는 외국인들을 직접 만나 감사를 표했다”고 전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이러한 특이한 장례의식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나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또한 황제가 황제로서의 의무를 멋지게 수행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는 말도 남겼다.
 
상여 따라가는 수행원 4800여 명
명성황후 국장 관련 의궤는 모두 네 종류가 전해진다. 국장 진행 과정을 설명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1637쪽), 산릉 조성 과정을 설명한 『홍릉산릉도감의궤』(942쪽), 시신을 모신 빈전과 위패를 모신 혼전에 대한 보고서를 담은 『빈전혼전도감의궤』(930쪽), 그리고 홍릉의 석물 설치에 관한 보고서인 『홍릉석의중수도감의궤』(134쪽)가 그것이다. 한 사람의 장례식 보고서가 이토록 방대한 것은 유례가 없다. 발인 행차를 그림으로 그린 ‘발인반차도’를 보면 상여를 따라가는 수행원이 대략 4800여 명이다. 과거 어떤 왕의 국장보다도 수행 인원이 많다.(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160쪽).
 
역사상 최초의 황후 장례식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매우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황후 시해는 백성들의 마음에 지워지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방대한 의궤와 성대한 장례식은 황후에 대한 진혼곡이면서 동시에 상처 입은 백성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일종의 ‘국상(國喪) 정치’였다. 장례식을 2년2개월이나 연기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황후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성립은 깊은 인과관계가 있다. 황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고종과 온 국민의 분노와 자각, 이를 계기로 국권을 회복하고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근대적 민국(民國)’을 건설하려는 의지가 황후의 처참한 시신을 놓고 뜨겁게 달아올랐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모르고 있다. 당시 친일개화파는 황후의 죽음을 자업자득이라며 비웃었다. 그 친일개화파를 선각자로 숭앙하는 시각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교과서나 역사책의 뼈대로 작용하고 있다. 황후의 죽음을 비웃는 시각으로 보면 백범 김구가 21세 때인 1896년 일본인 육군 중위를 살해한 후 “국모의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백범일지』에 밝혀놓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발표한 ‘이토의 죄목 15개 항’의 제1항이 ‘황후를 시해한 죄’였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고종은 장지 선정의 어려움을 이유로 장례식을 계속 연기했다. 실제 명당을 고르려고 했겠지만 고종의 진심은 황후의 명예 회복이 된 뒤에 장례를 치른다는 생각이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1896년 11월 19일은 상복을 입기 시작한지 1년이 되는 날인데, 장례는 물론 상복을 계속 입어야 하느냐 벗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이때 전 사헌부 장령 박인환이 상소를 올려 “『춘추(春秋)』의 원칙에 따라, 복수를 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상복을 벗을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고종실록』 1896. 10. 23) 고종은 박인환의 상소에 대해 ‘충애(忠愛)의 정론(正論)’이라며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또 23세가 된 태자 역시 “나라의 원수를 갚지 않으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또 나라의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은 『춘추』의 대의(大義)에도 어긋난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춘추복수론’이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에는 태자가 쓴 명성황후의 ‘예제행록(睿製行錄)’이 실려 있고, 그 뒤에 민영소가 쓴 ‘부기(附記)’가 실렸는데, 그 ‘부기’에 태자의 ‘춘추복수론’이 소개돼 있다. 장례를 계속 연기한 것은 단지 장지 선정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춘추대의론(春秋大義論)에 따른 복수에 있었던 것이다.
 
춘추복수론의 구체적 내용은 결국 역적에 대한 토벌과 고종의 위상 강화 그리고 국가 주권의 회복을 의미했다. 춘추복수론은 갈수록 확산돼 고종의 위상 강화를 주장하는 인사들이 점차 늘어났다. 이미 1896년 9월 9일 개성부 유학(幼學) 김시행 등이 고종의 ‘전제(專制)’를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역사의 흐름은 이제 복수론과 고종의 전제권 강화로 흘러가고 있었다. 칭제를 요청하는 상소도 잇따랐다. 황후의 죽음이 대한제국을 세우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81~82쪽).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공사의 조선 왕·왕비 알현도. 1895년 1월 25일자 도쿄 도요오도(東陽堂)에서 간행한 『풍속화보』(제84호) 수록. 왕과 왕비가 나란히 나온 희귀한 그림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일본 고서점에서 구입해 저서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태학사·2005)에 실었다.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공사의 조선 왕·왕비 알현도. 1895년 1월 25일자 도쿄 도요오도(東陽堂)에서 간행한 『풍속화보』(제84호) 수록. 왕과 왕비가 나란히 나온 희귀한 그림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일본 고서점에서 구입해 저서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태학사·2005)에 실었다.

 
‘황후 덕택에 대한제국 창건’ 밝혀
헐버트는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부터 고종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고 한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동료 선교사들과 3인1조로 함께했다. 고종은 격통과 공포 속에 식음을 제대로 못하고 미국인들이 보내준 식사만 들었던 때다. 음식을 담은 상자에 자물쇠를 잠가 고종에게 전달했다고 헐버트는 회고한 바 있다. 일제가 음식에 독을 넣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추진된 명성황후 장례식은 단순한 장례식이 아니었다. 을미왜변 이후 세 개의 큰 사건이 있었다. 황후 시해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을미의병으로 폭발했다. 그것에 힘입어 경복궁에 유폐돼 있던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국내 망명(아관망명·1896. 2. 11)을 시도해 성공했다. 아관망명 성공 즉시 친일개화파 정권은 무너졌고 고종의 왕권이 회복됐다. 그리고 경운궁으로 이차(移次)해 마침내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대한제국이 창건됐던 것이다.
 
대한제국을 창건하자 더 이상 국장을 늦출 이유가 없었다. 제국 선포 직후인 10월 13일 민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했고, 이틀 후인 15일 장례 일정을 확정했다. 발인은 11월 21일 하기로 했다. 11월 6일엔 명성황후 빈전에서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황제가 지은 ‘어제시책문’에서 고종은 “권강(權綱)을 자주(自主)하게 된 것은 곤도(坤度·황후)가 도와주었다”고 하여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이 황후의 덕택이라고 밝혔다. ‘권강을 자주한다’는 말은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권력을 임금이 쥐겠다는 뜻이다. 대한제국 탄생이 실로 을미왜변의 결과라는 것을 고종 자신이 공식화한 셈이다(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159쪽).
대한제국기 전차. 1899년 동대문~흥화문 구간에 첫 전차가 개통됐다. [사진 고궁박물관]

대한제국기 전차. 1899년 동대문~흥화문 구간에 첫 전차가 개통됐다. [사진 고궁박물관]

 
창건 이념 ‘대청독립·척왜 조선중화론’
황후 시해에 대한 ‘춘추복수론’이 대한제국 탄생의 감성적 밑거름이었다면, 이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신(新)존왕주의’와 ‘조선중화론’이었다. ‘춘추복수론’ ‘신존왕주의’ ‘조선중화론’은 고종에게 칭제를 요청하는 수많은 상소의 주요 내용을 차지했다. 황후 시해에 대해 복수를 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왕권 강화’를 요청한 이념이 신존왕주의다. 신분제 타파를 배경으로 한 근대적 왕권 강화라는 점에서 봉건적 왕정과 구별하기 위해 ‘신존왕주의’라고 부른다(중앙SUNDAY 10월 15일자, 8회 ‘왕정과 근대화 역설’ 참조).
 
신존왕주의와 짝을 이루는 이념이 ‘조선중화론’이었다. 도덕적 유교문화의 정수를 의미하는 중화(中華)는 조선 후기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무너진 조선의 자존심을 지탱해준 것이 중화 개념이었다. 공자와 맹자의 땅인 명나라가 중화의 본산이었으나 명나라가 ‘여진족(만주족) 오랑캐’에 의해 망하자 이제 조선 지식인들은 중화문화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청나라 태종에게 몸을 숙여 절을 했지만 마음까지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 배척 의식 속에서 ‘조선중화론’이 싹텄다. 명나라 멸망 이전에 조선을 일컫던 ‘소중화론’이 중국에 중화국가가 부활할 때까지 조선을 유일한 중화국가로 여기는 ‘한시적 조선중화론’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송시열이고, 송시열의 조선중화론을 계승한 이들이 19세기의 위정척사파다. 즉 이항로와 그의 제자인 최익현·유인석 등 정통 성리학 유생들이다(배우성, 『조선과 중화』 578~599쪽).
 
송시열·이항로·최익현·유인석 등의 중화론은 기본적으로 조선보다 중국을 중시했다. 말만 조선중화론이었지 실제 내용은 중국 다음에 조선을 놓는 ‘소중화론’이었다. 최익현과 유인석이 일제 침략에 항거하며 활발하게 의병 투쟁을 전개했지만 그것은 ‘중화(중국)의 부활’과 ‘주자학 조선의 복원’에 중점을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창건하고 황제국을 선포하는 데 그들은 반대했던 것이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기를 바라는 ‘칭제 요청’ 상소의 주역들은 무명의 동네 유생들이었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이들은 전국 곳곳에 산재했다. 각 지방에서 훈장·법률대서·사주점술·의술 등으로 생업을 하며 때로 민란이나 의병을 이끌고, 지방관리로 복무하기도 하고, 또는 상경해 정부와 궁내부 및 그 산하의 관리로 복무하기도 하고, 애국계몽운동의 필객·교사로서 언론·교육 활동을 전개한 이들이다. 위정척사파와 달리 이들은 중국을 의식하지 않았고 성리학에서도 벗어난 모습을 보였다. 일제의 침략과 함께 청나라의 압력도 배격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위정척사파와는 다른 ‘조선중화론’, 즉 ‘대청독립(對淸獨立)·척왜(斥倭) 조선중화론’을 이야기했다.
 
전국의 동네 유생들은 칭제 요청 상소를 통해 높은 민족문화를 바탕으로 한 독립 국가의 자부심과 민족의 자주성을 조선중화론으로 표현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을 ‘중화’로 높인답시고 서양 제국들을 ‘양이’로 깎아내리지 않았고 조선과 대등한 ‘중화국가’로 대했다. 우리가 서양에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 서구식 근대화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대한제국의 창건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271~272쪽)
 
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대한제국 시기의 정치 세력을 대개 위정척사파와 친일개화파, 이렇게 두 정파로만 나눠 보곤 했다. ‘척사냐 개화냐’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대한제국 시기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위정척사파는 중국을, 개화파는 일본을 종주로 삼는다. 그러면서 위정척사파는 근대화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보고, 친일개화파 중심으로 근대사를 서술해 왔다. 같은 유학자라 해도 위정척사파와 생각을 달리했던 수많은 ‘무명 지방 유생 대중’이 있었음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위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로 이어지는 친일개화파의 ‘왕권 무력화’에 반대한 고종과 근왕 세력들은 위정척사파와 같이 도매금으로 비난을 받곤 했다.
 
고종은 근대화를 추구한 ‘개명군주’였지, 결코 유교 국가로의 복귀를 지향한 도학군주가 아니었다. 칭제에서 보듯이 이미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했기에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1899년 한·청 통상조약을 체결했고, 간도 영토분쟁에도 공세적으로 대응했다.
 
1899년 4월 27일 고종은 유교 관련 조칙을 발표했다. 유교를 장려하는 내용이었지만 유교 국가의 부활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기독교도 전교(傳敎)의 자유를 인정받으면서 유교와 동등한 종교가 됐기 때문이다. 유교는 더 이상 황제정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서영희 ‘대한제국의 빛과 그림자’, 『한국사 시민강좌』 제40집, 2007. 220쪽).
 
고종은 이미 전통적 유교 정치이념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있었으므로 황현 같은 위정척사파와 가까운 유생들로부터 “부강정책에 예의 주시하여 경장에 급급했으며 외국을 동경하여 선조의 제도를 변경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참고자료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청계·2017),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한영우·효형출판·2001), ‘대한제국의 빛과 그림자’, 『한국사 시민강좌』 제40집(서영희·일조각·2007),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조선중화사상연구』(정옥자·일지사·1998), 『중국 없는 중화』(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인하대학교출판부), 『조선과 중화』(배우성·돌베개·2000)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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