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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의리, 정조의 의리, 그리고 박근혜의 의리

유성운의 역사정치⑤
#1.
“아들 죽이고 개선가라, 이건 또 뭐지?”  
“울려야지, 당연히 울려야지. 그게 주상과 우리의 의리야!”  
“그 의리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2.
“선대왕(영조)과의 의리를 잊지 마시오, 주상”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할마마마”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다룬 영화 ‘사도’에는 유난히 ‘의리(義理)’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전자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뒤 개선가를 울리며 궁으로 행차하는 것을 바라보던 노론계 대신들이 주고받는 장면입니다. 딱히 어색하지는 않습니다.  
후자는 어떨까요. 정순왕후가 정조에게 옥새를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왕과 대비 사이라지만 손자에게 ‘할아버지와의 의리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들립니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학계에서는 15세의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가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앙포토]

영화 '사도'의 한 장면. 학계에서는 15세의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가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앙포토]

이처럼 영화 ‘사도’에서 등장인물들이 ‘의리’를 강조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정조 시대가 말 그대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주고 받는 ‘의리(義理)’는 글자 그대로의 뜻을 넘어 이 시대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부른 신임의리(辛壬義理)
조선 19대왕 숙종이 사망할 무렵 조정은 세자(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으로 나뉘었습니다.
어렵사리 경종이 즉위했지만 힘이 없었습니다. 모친이 폐비된 장희빈이라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그렇기에 노론 측은 주장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등 노론 측 인사들은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연잉군을 왕위 계승자인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직 30대에 불과한 왕에게 왕세제를 요구하는 것만 해도 괘씸한 마당에 대리청정까지 들고 나온 것은 지나친 요구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측에서는 연일 노론을 공격했습니다.
 
때맞춰 노론 인사들이 반역 모의를 벌였다는 밀고 사건이 벌어지면서 노론은 풍비박산이 납니다. 김창집 등 주요 인물들이 처형되고 관련자 200여명이 귀양을 가거나 처벌받습니다. 이 과정이 1721년(신축년)부터 1722년(임인년)까지 이어지면서 신임의리(辛壬義理)라는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다가 곤란을 겪은 노론 측 의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노론의 고난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사망하고, 영조가 집권하자 노론의 세상이 시작됩니다. 영조의 지지기반이었던 노론은 신임의리를 내세우며 붙박이 ‘여당’ 노릇을 하게 됩니다. '신임의리'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금과옥조'가 됐습니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조는 41세에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무척 아꼈지만 양측의 관계는 파국으로 끝났다. [중앙포토]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조는 41세에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무척 아꼈지만 양측의 관계는 파국으로 끝났다. [중앙포토]

하지만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에 나서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혈기왕성한 세자는 노론의 특수한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노론은 그런 세자와 첨예한 갈등을 빚게 됩니다. 문제는 사도세자의 이같은 태도가 자칫 신임의리에 대한 부정으로 비쳐지고, 더 나아가 아버지 영조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확대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보면 영조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할 때는 출입문이 다르고, 안 좋은 의미를 가진 한자는 절대 쓰지 않는 등 무척 예민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작용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노론계 대신들의 대화 #1은 이런 배경에서 나오게 됐을 것입니다. 또한 ”그 의리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라는 우려는 얼마 후 현실화 됩니다. 
 
정조의 반격, 임오의리(壬午義理)
사도세자의 비극은 또 다른 의리를 만들어 냅니다. 임오년(1762년) 사도세자의 죽음 과정에서 세자를 보호하려 애쓴 소론과 남인 측이 강조하는 임오의리(壬午義理)입니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고비를 겪었던 정조는 왕권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16년이 지난 뒤 이를 끄집어 냈습니다.
이무렵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영남 유생 1만 57명이 연명해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모함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이른바 영남 만인소 사건입니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조는 직접 뒤주에 가둘 것을 지시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뒤엔 개선가를 울리며 입궐했다. [중앙포토]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조는 직접 뒤주에 가둘 것을 지시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뒤엔 개선가를 울리며 입궐했다. [중앙포토]

드디어 정조가 봉인을 해제합니다. 그간 금기시됐던 사도세자의 정치적 복권을 공식적으로 꺼내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경기 화성 융릉에 사도세자의 묘역을 조성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에 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노론에 대한 보복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임의리를 내세워 사도세자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노론 측은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조는 이같은 분위기를 이용해 소론과 남인을 적극 등용하며 당파간 세력균형을 맞추는데도 성공합니다."'신임의리'를 인정해 노론의 지위를 건드리지 않을테니 나의 '임오의리'도 인정하라"는 것이 정조의 입장이었습니다. ‘신임의리’에 ‘임오의리’로 맞불을 놓은 것입니다. 
 
한 발짝 더 들어가자면 정조가 벌인 작업은 ‘임오의리’의 수정 버전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영조가 만든 원조 '임오의리'가 있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가 가져올 화근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신하들의 행동을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이를 ‘임오의리’라고 규정했습니다. 세손인 정조에게는 향후 임오년의 비극에 대해 끄집어 내지 않을 것을 확약 받았습니다.
 
“임오년에 대의(大義)를 밝히지 않았더라면 윤리가 그때부터 폐지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늘 내가 있었겠으며, 세손 또한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는가?” (『영조실록』)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함께 묻힌 융릉. 지금의 서울 휘경동에 있던 묘를 정조가 '천하제일의 길지'라며 화성시로 이장했다. [중앙포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함께 묻힌 융릉. 지금의 서울 휘경동에 있던 묘를 정조가 '천하제일의 길지'라며 화성시로 이장했다. [중앙포토]

정조는 왕위에 오르는 조건으로 ‘신임의리’와 ‘임오의리’를 수용해야만 했습니다. 두 가지 '의리'는 영조 시대의 '독트린(doctrine)'이었습니다. 
영화 ‘사도’에서 정순왕후가 정조에게 “선대왕(영조)과의 의리를 잊지 마시오“라고 신신당부하는 것도 수긍이 갑니다. 이 말엔 두 가지 의리를 뒤집을 경우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경고와 우려가 담겨있습니다. 정조 또한 그런 위험을 알았기 때문에 '임오의리'를 수정하는데 16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학계에서는 정조가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임오의리’를 수정하는데 집착했던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로 설명합니다. 대체로 정조의 권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쪽으로 방향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훗날 자신의 정통성을 두고 벌어질 논란이나 신료들의 왕위 계승 개입을 방지하고, 노론을 견제해 왕권을 높이려는 시도였다는 이야기입니다.  
 
1736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책봉할 당시 반포한 글을 새긴 ‘장조 왕세자 책봉 죽책’(부분).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1736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책봉할 당시 반포한 글을 새긴 ‘장조 왕세자 책봉 죽책’(부분).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하지만 사적 은원을 정치적 어젠다로 활용한 대가는 컸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당초 '의리'를 적절히 활용해 자신의 왕권을 보호하고 당파간 균형을 잡으려 했다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노론은 세손에 대한 입장과 정조의 '임오의리'를 수용을 놓고 남당(南黨)과 북당(北黨),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나뉘었고, 소론도 노론에 대한 입장 차이로 완소(緩少)와 준소(峻少)로 분열하는 등 당파가 더욱 복잡하게 분열했습니다. 또한 이런 분열 과정을 거치며 당파간 조율은 어려워지고, 상호간의 불신과 갈등은 더욱 심화됐습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세상은 다시 한 번 또 바뀝니다. 숨죽이고 있던 노론이 '임오의리' 수정을 문제삼으며 재반격에 나섰는데, 이때 남인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이후 조선 정계에서 사실상 사라집니다.

 
이처럼 영조~정조~순조 3대에 걸쳐 '의리'를 둘러싸고 자행된 피의 보복은 조선의 정치 시스템을 회생불능 상태로 끌고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당파가 몰락하고 극소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자리잡게 됩니다. 지도층의 이해관계에 맞춰진 ‘의리’의 생성과 변천이 정치에 파국을 불러오고 공멸을 불러온 셈입니다. 이후 나라가 외부에 넘어가는 데는 100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박근혜의 의리와 보수의 비극
20일 한국당이 윤리위를 소집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자진탈당 권고를 의결하자 친박계가 반발하며 파장이 만만치 않습니다.
최경환 의원은 이날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사도 없이 외로이 투쟁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강제출당요구는 정치적 패륜행위이고 배신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19일엔 이장우 의원도 “멋대로 전직 대통령을 내쫓겠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스럽다”고 개탄했습니다. 서청원 의원은 22일 “홍준표 퇴진에 나서겠다”며 집단 행동 가능성도 예고했습니다. 
사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출당을 추진하는 홍준표 대표도 지난 대선에선 “‘살인범도 용서하지만,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TK(대구·경북) 정서”라며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를 공격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지난해 7월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열린 친박계 의원 모임에서 인사말을 하는 서청원 의원. [뉴스1]

지난해 7월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열린 친박계 의원 모임에서 인사말을 하는 서청원 의원. [뉴스1]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은 한국 정치사에서 유달리 ‘의리’를 강조한 세력입니다.
2008년 총선 때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박 전 대통령에 호소에 ‘친박연대’라는 전무후무한 명칭의 정당이 탄생했고, 2016년 총선 때는 박 전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언급하자 한 유력 정치인이 공천과정에서 ‘친박 감별사’로 활동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의리론'은 한 때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며 대권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두 차례에 걸쳐 보수세력의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보수세력은 그 '의리'가 불러온 파국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3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3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시대에 노론과 소론이 각기 ‘의리론’을 부르짖으며 다툼을 벌인 것은 권력의 원천이 국민이 아닌 군주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생을 외면하더라도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군주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인정 받으면 명분을 얻어 집권세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1948년 제정된 헌법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명시했습니다. 선출직 정치인의 의리가 개인이 아닌 국민과 국가로 맞춰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300년 전 왕조 시대에 횡행했던 ‘의리론’이 여전히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시대의 ‘의리’를 무엇이라고 명명할지 궁금해집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최성환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임오화변(壬午禍變) 관련 당론서(黨論書)의 계통과 ‘정조의 임오의리’』,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 오수창 서울대 교수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 유봉학 한신대 교수 『개혁과 갈등의 시대-정조와 19세기』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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