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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본 영화 [남한산성]의 김상헌·최명길

공동체·구성원 위한 옮음과 옮음의 부딪힘...지도층의 무능과 분열이 더 큰 문제

전인미답의 길 우회하지 않고 걷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이 화제다. 고립무원의 산성에 갇혀서 조선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던 47일. 화친이냐 항전이냐의 치열한 논쟁뿐 아니라 임금과 사대부들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수난을 당해야 했던, 민초들의 고통도 직시한다. 이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영화 자체가 잘 만들어진 덕분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현재 우리의 상황과 오버랩되기 때문일 것이다. 불확실한 나라의 미래, 지도층의 무능과 분열…. 그 속에서 한반도는 400여 년 전에도, 지금도, 명분과 현실, 자존심과 실리, 전쟁과 평화, 존립과 파멸이라는 선택지를 받아들고 있다. 이런 현실이 영화를 통해 과거를 탄식하고, 현재를 걱정하며, 미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 하나만으로 원하는 해답을 기대할 수도 없을 터다. 다만, 위기에 대비하지 않은 나라는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행동하지 않는 비겁함은 파국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교훈도 준다. 그리고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을 고려했고, 무엇을 우선했는지, 주인공들의 가치 기준과 신념을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주지하다시피, 김상헌의 척화(斥和)와 최명길의 주화(主和)는 화친에 대한 단순한 찬반 논쟁이 아니다. 선악시비(善惡是非)로 나눌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존주대의(尊周大義), 즉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예(禮)와 문명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도덕 가치의 준수 여부와 직결된다. 또 이 가치가 종묘사직과 백성의 안위라는 국가가 지향해야 할 또 다른 가치와 충돌하는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할 것인지, 그 결정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지가 핵심이 된다. 요컨대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립은 옮음과 옮음이 부딪히는 가운데, 무엇이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위해 더욱 중요한지를 논하는, 신념의 대결이었다. 지금도 어떤 원칙을 따르고, 어떤 기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상황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병자호란은 청나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황제의 나라를 자처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새 질서에 조선이 순응할 것을 요구했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면서 발발했다. 청나라는 조선을 응징하겠다며 대군을 보냈는데, 명나라와의 결전을 앞둔 상황에서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실 청나라의 요구는 조선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명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고 있는데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부터 ‘재조지은(再造之恩, 멸망해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을 입은 조선으로서는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를 섬길 수는 없었다. 이는 군신의 의(義)를 배반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존주대의를 무너뜨리는 반문명적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 중요한가
 
하지만 조선은 자신의 의(義)만 천명했을 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청의 요구를 오랑캐의 참람한 망동(妄動)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싸울 준비도, 외교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 같은 행태를 두고 최명길은 “진실로 화친을 끊겠다면 어찌 어정쩡하게 대응하면서 한마디의 말도 한 가지의 계책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까? 간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싸우거나 지키기 위한 계책을 세우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신의 말을 받아들여 병화를 늦추는 계책도 시행하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오랑캐 기병들이 휘몰아 깊숙이 쳐들어 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최명길은 오랑캐의 형편을 탐지하고 정세를 살펴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했는데,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들은 어찌 우리가 먼저 허리를 굽혀 저들에게 사신을 보낼 수 있느냐며 최명길을 비난했다.
 
결국 최명길의 우려대로, 청나라 군대가 국경을 넘어 한양으로 진격해왔고, 조선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농성(籠城)에 나섰지만, 그야말로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다. 그러자 최명길이 다시 나선다. 그는 굴욕을 감수하더라도 청나라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고 존주대의를 수호해 조선의 자긍심을 지키는 것이 올바른 도리이며 정론(正論)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 중요하냐는 것이다. 최명길은 “우리 천승(千乘)의 나라(조선)를 지켜 보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임금이 쓸모없는 마음을 품게 해서 명나라를 위해 충절을 바쳐야 한다고 하니, 이는 필부가 (절개를 지킨다며) 개울이나 도랑에 빠져 죽는 것과 다름없는 작은 신의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결코 춘추에서 강조한 ‘각각 그 임금을 위한다’라는 대의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의 백성이고 사직이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것은 ‘필부의 의’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책임하다는 뜻이었다.
 
최명길의 주장은 그가 다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국가의 의리’와 ‘개인의 의리’를 분리해 본데 기인한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표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안민(安民)’에 있는 이상,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올바름’이 되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그름’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나라가 멸망할지라도 절개를 지키는 것이 의로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나라의 멸망을 방치하는 것은 백성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그른’ 일이다. 따라서 개인의 절개를 포기하더라도 나라의 생존을 우선하는 것이 ‘국가의 의리’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죽고 멸망할지언정 지고불변의 가치를 거슬러서야
 
하지만 그럼에도 오랑캐에게 항복하고 굴종하라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였을 것이다. 최명길이 ‘권도(權道)’라는 유학의 실천개념을 논거로 사용한 까닭도 그래서다. 유학에서는 도(道)에 이르는 방법으로 경도(經道)와 권도, 두 가지를 제시한다. 이 가운데 경도란 도를 구현하는 보편타당한 원칙을 뜻하고, 권도란 비정상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경도에서 벗어난 임시변통의 방법을 써서 도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권도의 지향점 역시 도(道)에 있다는 점에서, 권도와 경도가 서로 배치되는 관계는 아니다. 경도와 현실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경도가 세상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할 때, 바로 이 권도를 써서 경도와 합일하고, 도를 실현해가는 것이다. 이를 가지고 설명해본다면, 예(禮)·의(義)와 문명의 도덕국가 조선의 번영(道)을 위해 명나라와의 신의를 지키고 오랑캐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경도’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나라와 백성의 안위가 전제돼야 하는데, 지금은 백성이 고통 받고 종묘사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상황이므로 ‘권도’로 오랑캐에 대한 굴욕적인 항복도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이 최명길의 주장이다. 유교사상의 관점에서 봐도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명길의 생각은 사대부들로부터 지탄을 받는다. 그의 목을 베라는 상소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아무리 ‘권도’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한다지만, 성리학자들의 도덕 윤리관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최명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주화라는 두 글자가 평생 신의 허물로 따라다니겠지만 지금 화친하는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대의명분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그 시대에, 오랑캐와의 화친을 주장한다는 것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일이었지만, 나라의 안위를 위해 주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최명길은 “신하가 나랏일을 도모하면서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의 뜻대로 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이르렀다면, 그 일이 비록 바르더라도 그 죄는 면할 수 없습니다”라고도 했다. 척화가 아무리 옳은 명분, 의리라 해도 나라의 존망, 백성의 평안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도 다툼에 여념 없었던 무능한 대신들
 
김상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고로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죽고 망하는 것은 인내할 수 있어도 역(逆)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개인의 삶과 죽음, 국가의 존망을 초월하는 지고불변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죽고 멸망할지언정 그러한 가치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김상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람들은 ‘저들의 세력이 강하여 따르지 않으면 필시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은 명분과 의리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것인 만큼, 이를 범한다면 또한 큰 재앙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려서 종국에 멸망을 면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올바름을 지키면서 하늘의 명을 기약하는 것이 어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명을 기약한다고 하는 것이 한갓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일이 순리대로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기뻐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기뻐하면 근본이 견고해집니다. 이것으로써 나라를 지켰는데 하늘의 보우를 얻지 못한 적은 없었습니다.”
 
김상헌이 보기에 나라의 생존을 위해 오랑캐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명분과 의리는 상황이 어떠하든, 어떤 대가를 치르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포기한다면 설령 생존한다 해도 죽은 것보다 못하다. 원칙이 무너졌는데 나라가 제대로 존립할 수는 없는 법이니, 차라리 원칙을 지키면서 어려움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두 사람의 신념은 바로 남한산성에서 치열하게 맞붙는다. 김상헌은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며 청군과 맞서 싸우고자 했고, 최명길은 목숨을 걸고 적진을 오가며 화친을 교섭했다. 상상력과 허구가 가미된 부분은 있지만, 영화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길 중 옳은 길은 무엇일까? 실존의 문제, 생존의 문제가 그렇듯 정답은 없을 것이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판가름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내가 한 사람의 개인이라면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정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공동체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구성원들의 안위와 공동체의 미래를 심사숙고하며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영화에서도 보여주는 것처럼, 최명길과 김상헌의 치열한 고민, 최명길과 김상헌의 헌신적인 노력이 전제되지 않고, 말로만 떠드는 자들이 초래하는 위험성이다. 전쟁을 예견하지 못했고,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으며, 막상 전쟁이 일어나도 다투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그 사람들처럼 말이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말의 길은 마음속으로 뻗어있고 삶의 길은 땅 위로 뻗어 있다. 삶은 말을 온전히 짊어질 수 없고 말이 삶을 모두 감당해낼 수도 없다. 말의 길과 삶의 길을 이으려는 인간의 길은 흔히 고통과 시련 속으로 뻗어 있다. 이 길은 전인미답이고 우회로가 없다.’ 선택의 타당성을 떠나, 최명길과 김상헌은 모두 그 전인미답의 길을 우회하지 않고 걸어갔던 사람들이다.
 
굴욕의 현장인 남한산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해마다 32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굴욕의 현장인 남한산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해마다 32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에필로그 1.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종전과 함께 자결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김상헌은 최명길이나 인조보다도 오래 살았다. 1652년(효종 3년)에 죽는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낙향했는데, 오랑캐에게 굴종한 조정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것이었지만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최명길은 친구 장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조선의 신하입니다. 나의 나라, 나의 임금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중국 조정만 위하는 것은 월진(越津, 나루를 건너고 배를 탄다는 뜻으로, 앞뒤가 바뀌었다는 뜻)의 혐의가 없지 아니합니다…(중략)…조선의 신하는 명나라를 위하여 내 나라를 망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땅한 의리로서, 실로 성현의 가르침에도 부합할 것입니다. 그런데 김상헌 선생은 이 의리에 어둡습니다.”
 
#에필로그 2.
 
병자호란이 끝나고 6년 후인, 1643년(인조 21년), 최명길은 청나라로 압송됐다. 비밀리에 명나라 정부와 연계를 추진하다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의 기세가 막강하긴 했지만 한족의 정통왕조인 명나라가 그리 쉽게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종국에는 ‘남송-금’과 같이 명나라와 청나라가 중원을 양분하는 선에서 전선이 고착되리라는 것이 최명길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고려가 금나라와 남송에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입지를 확보했듯이 조선도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명나라는 내부의 분열과 농민 반란으로 스스로 무너져버렸고, 이 과정에서 청나라에 투항한 명나라 대신 홍승주가 명과 조선의 비밀 교섭을 폭로한 것이다. 최명길은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투옥됐다. 그런데 이 때 최명길은 심양의 감옥에서 김상헌과 조우한다. 김상헌은 청나라에 반대하는 불순분자로 지목되어 먼저 끌려왔던 터였다. 감옥 안에서 두 사람은 “우정을 찾고 백년의 의심을 풀었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자신의 명분만 고집한다는 편견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의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었고,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한 편이 되려 한다는 오해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고심 어린 선택으로 이해됐다. 하지만 방법론의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던 것 같다. 최명길이 “끊는 물과 얼음물이 모두가 물이요/ 갓옷과 베옷 또한 옷 아님이 없으니/ 일은 혹 때에 따라 달라질지라도/ 마음이야 어찌 도에서 어긋나겠는가?”라고 하자, 김상헌은 “권도는 현인조차도 잘못 쓸 수 있으니/ 경도로 대응해야 사람들이 어기지 못할 것이다/ 이치 밝은 선비에게 말 하노니/ 조차간에 저울질을 신중히 하시게”라고 답한 것이다. 자신이 권도를 따른 것은 변화된 상황에 부응하기 위한 것일 뿐, 그 마음만큼은 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최명길의 말에 김상헌은 권도를 추구하지 말고 경도에 충실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에필로그 3.
 
영화에서 현명하고 강직한 장군으로 나왔던 수어사 이시백은 사실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다. 그는 대학자 성혼의 제자로, 최명길·장유·조익과 절친해 ‘사우(四友)’로 불렸다. 서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의 2등 공신에 올랐던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병자호란 당시 이시백은 실제로 남한산성의 방어를 책임졌는데 군사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고 한다.
 
#에필로그 4.
 
김상헌은 충절의 대명사가 되어 그의 가문은 교목세가(喬木世家,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집안)라고 불렸으며, 후손들도 그 후광을 입었다. 손자 대에만 영의정 2명(김수흥·김수항)이 나왔고, 7대손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열었다. 이에 비해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은 비록 영의정에 오르기는 했지만 “화의를 주장한 최명길의 손자로 수치를 잊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 필자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 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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