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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③별별만사-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을 지킨 사나이는?

“당신은 왜 일하십니까?”
우리가 지나쳐보던, 우리들의 일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리 이웃이 전하는 '내가 일하는 이유'를 들어보시죠. 마지막회는 '별별만사', 우리가 몰랐던 다양한 직업들입니다. '스압(스크롤 압박)' 주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으시다면 중앙일보 웹과 앱에서 '직업의 정석'을 검색해 주세요./
특별취재팀=김현예·정선언·정원엽 기자, 사진 우상조 기자, 디자인 김은교, 영상 조수진 hykim@joongang.co.kr 
 
"칭찬은 코끼리도 말하게 한다" 나는 코식이 아빠 김종갑입니다
[사진 에버랜드]

[사진 에버랜드]

“코식아, 코식아!” 김종갑(49) 에버랜드 사육사가 먼발치에서 부르자 건초를 먹던 코식이가 고개를 돌린다. 기분이 좋은 듯 코를 좌우로 흔들며 걸어온다.  
코식이는 세계 유일의 말하는 코끼리다. 올해 27살. 코끼리 평균 수명이 60~70년이니, 사람으로 치면 가장 팔팔한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최근 결혼도 했다. 한참 연하인 16살 ‘하티’가 코식이에게 시집왔다.  
"코식아, 좋아?" 김종갑 사육사가 묻자, 코를 입으로 가져간 코식이가 소리를 낸다. “좋아~좋아~.” 묵직한 저음이지만 분명한 발음이다. 코식이는 ‘누워, 아직, 발, 앉아’와 같은 짧은 단어 7~8개를 말한다. 독일 생물학자와 오스트리아 코끼리 음성전문가가 코식이의 말을 연구한 논문이 세계적인 생물학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리기도 했다. 코식이는 왜, 말을 하게 된 것일까.

 
1993년 아시아 코끼리 한 마리가 동물원에 왔다. 서울대공원에서 태어난 3살짜리 아기, 지금의 코식이였다. 김종갑 사육사가 담당이 됐다. 어릴 때부터 꿈꿔온 코끼리를 맡게 되다니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처음 만난 코식이는 애처로워 보였다.  
“코끼리치고는 눈이 컸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충혈됐더라고요. 많이 불안해하는 느낌이었어요. 부모를 떠나 낯선 곳에 왔으니 그랬겠죠. 코식이는 겁이 많고 소심했어요. 키 2m의 코식이가 그땐 너무 작아보였어요. 안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침낭을 구해와 코식이랑 먹고 자기로 했어요.”
[사진 에버랜드]

[사진 에버랜드]

코식이는 새벽 1시나 되어야 잠이 들었고,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김종갑 사육사는 코식이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코식이는 아주 천천히 곁을 내줬다. 그렇게 코식이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됐다.  
 
2004년 어느 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코식이가 ‘우~웅’하는데, 얼핏 들으면 사람 고함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단어'로 들리게 된 건 2006년부터다. 코식이는 입에 코를 집어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가 평소 만져주고 씻겨주며 ‘좋아?’하고 묻고 했는데, 코식이가 그 소리를 따라한 것이었다. 코식이가 세계 최초의 ‘말하는 코끼리’가 된 데에는 김종갑 사육사의 정성이 있었던 셈이다.  
인터뷰 원문 보기
[직업의 정석]"칭찬은 코끼리도 말하게 한다" 나는 코식이 아빠 김종갑
나는 왜 일하는가
저는 행복하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힘든 일을 한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에요. 생각해보세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할까요?  
만약 제가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제 이름을 불러줄까요?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라는 것도 없을테지요. 제가 코식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코식이가 저를 알아보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사육사는 힘들어야 해요. 그래야 동물이 행복하니까요. 동물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져요.사육사는 사랑을 나눠줘야 해요. 동물이 잘 먹고 있는지 아프지 않은지 관심을 계속 가져야 하죠. 동물들은 아프면 본능적으로 숨겨요.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생존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계절에 따라 동물들이 얼마나 먹는지, 변은 얼마나 보고 눈빛은 어떤지 매일 관찰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죠. 저는 제 직업이 자랑스럽습니다.
"직접 모신 대통령만 4분" 나는 염장이 유재철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葬禮)를 지낸다. 장례 절차 중 시신을 씻겨 수의를 입히는 일을 염습(殮襲)이라고 한다. 염장이는 염습을 하는 직업이다. 사람에게 ‘세상 마지막 목욕’을 시키는 사람, 그렇게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사람이 염장이다.  
 
염장이는 산 사람과의 약속을 잘 잡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언제든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과의 약속이 훨씬 더 중요한 직업, 염장이로 24년을 살아온 유재철(58ㆍ장례문화원 원장) 씨와 어렵게 약속을 잡아 만났다. 
유재철 원장은 흔히 ‘대통령 염장이’로 불린다. 최규하(2006년)ㆍ노무현(2009년)ㆍ김영삼(2015년) 전 대통령을 직접 염습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2009년)도 염습은 세브란스병원에서 했지만, 국장 식 진행은 유 원장이 맡았다. 그는 “염장이가 아니었으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 세 분 손을 잡아보고 얼굴을 만져보고 했겠냐”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큰 분들 장례식이 의미가 있는 건 잘못된 예(禮)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 주위엔 잘못 알려진 장례 예절이 꽤 많다. 가령 상주가 왼팔에 검은 완장을 차는 것은 일제시대의 흔적이다. 대통령 장례식 때 의장대가 흰색 마스크를 쓰는 것도 장례 기간 시신이 부패되는 걸 막기 어려웠던 시절 관행이다. 영정에 검은 띠를 두르는 것은 예법상 근거가 없다. 유원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식 때 상주 완장, 의장대 마스크를 없앴다.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때 영정 띠가 사라진 것도 그의 조언 덕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이나 장례에는 차이가 없어요. 중요한 건 배경이 아니라 고인이니까. 고인을 생전 모습처럼 모시면 그걸로 충분해요. 정성껏 고인을 생각하며 염을 하는 게 내 일이예요."
 
인터뷰 원문 보기
[직업의 정석] "직접 모신 대통령만 4분" 나는 염장이 유재철입니다
 
나는 왜 일하는가
"제가 무슨색 속옷을 입었는지 아세요?"  

유재철 원장은 인터뷰 도중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그는 빨간 팬티를 입는다고 했다. "매일 검은색과 흰색 옷만 입으니까, 사방색(四方色) 중 붉은색이나 푸른색을 보완해 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만큼 염장이 일에는 중용(中庸)이 중요하다는 거였다.  
장례식장에 가서 내가 상주도 아닌데 울상을 짓고 있으면 안되요. 상주가 절차나 과정을 못 물어보거든요. 너무 밝아도 예의가 아니고, 너무 어두워도 예의가 아니에요. 사실 저는 제 맘대로 자라서 성격이 좀 괴팍한 편이예요. 하지만 일을 할 때 만큼은 너무 즐거워요.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죽음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옛날 왕의 장례는 정승이 주관했어요. 저도 정승 못지 않은 자부심으로 일합니다. 하루하루 매순간이 쌓여서 내 인생, 내 삶이 되는거잖아요.
 
"스타워즈 대신 SNL" 나는 특수분장사 오창렬입니다
"날 잡았으니 들어오너라.”

199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특수분장학교에 다니던 오창렬(47) 씨에게 부모님의 일방적인 통보가 떨어졌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결혼날짜를 잡았다니. 할리우드가 코앞에 있는데, 이제야 어릴 때부터 그려오던 꿈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게 됐는데.  
 
예식장까지 잡아놓은 완강한 부모님을 이길 순 없었다. 가장이 됐으니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일감이 없었다. 살길이 막막했다. 찾아간 곳은 영화 세트 업체. 일 좀 하게 해달라고 사장님에게 매달렸다. 사무실 한 귀퉁이에 책상을 하나 두고 영화 특수 소품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한 번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김현정 감독, 한석규 주연의 '이중간첩'(2002년)이었다. 뛸 듯이 기뻤다.  
 
이듬해는 특수분장 비중이 좀더 높은 작품이 들어왔다. 김은숙 감독, 이성재·송승헌·김하늘 주연의 '빙우’(2004년),신정원 감독의 ‘시실리 2㎞' 일을 도맡았다.한 미술감독의 소개로 장진 감독을 만났다. 그와 함께 한 첫 작품이 '박수칠 때 떠나라'(2005년)였다. ‘거룩한 계보’(2006년)와 ‘아들’(2007년)까지 내리 3년을 장 감독과 함께 일했다.
일을 못할 땐 일만 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는데, 일거리가 계속 들어오자 슬슬 딴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영화판에서 10년 넘게 일했는데 살림살이는 별반 나아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마음에 걸렸다. 그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사는 동안, 노부모는 서울 전역을 돌며 세탁소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아내 역시 고단한 삶을 살았다. 남편 벌이가 시원찮으니 일하지 않으면 집이 돌아가질 않은 탓이다.돈 생각이 간절하던 그때, 친구가 ‘중국에서 웨딩사업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이른바 ‘한국식 웨딩사업’으로,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를 팔아보자는 것이었다. 사업은 제법 굴러가기 시작했다. 경영은 현지 동업자가 하고, 그는 실무를 챙겼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 출근하니 회사 경리 낯빛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냐’고 다그치니, 현지인 동업자가 이중장부를 만들어 돈을 다 빼돌렸다는 것이다. 회사에 남은 돈이 없어 투자금을 회수할 길도 없었다. 중국에 간지 만 2년 만인 2011년 초, 빈손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무서워 두문불출하던 그를 집 밖으로 불러낸 사람은 장진 감독이었다. 그는 “tvN에서 하는 ‘SNL 코리아’란 프로그램을 맡게 됐는데 딱 세 번만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SNL은 사람들을 ‘빵빵 터뜨리는’ 핫(hot)한 패러디의 중심지가 됐다. 개그맨 신동엽·유세윤·정성호·김민교·정상훈 씨 등이 그에게 얼굴을 맡긴다. 



인터뷰 원문 보기
[직업의 정석]"스타워즈 대신 SNL" 나는 특수분장사 오창렬입니다

나는 왜 일하는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고마워서 일해요.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던 제가 집 밖으로 나와서 일을 하게 됐잖아요. PD님, 미술감독님들, SNL 출연진들, 제작진, 너무 감사하죠.  

저한테 일이란 밥줄이니까, 이분들이 은인이나 마찬가지에요. 제 이름 석자걸고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준 사람들이니까요.
제가 한 특수분장이 배우의 연기와 녹아서 잘 부각되면 뛸 뜻이 기뻐요. 가령 대선후보 패러디를 했는데, 시청자들이 똑같다고 칭찬하면 ‘아, 내가 일말의 보템이 됐구나’ 생각해요. 고마운 사람이요? 개그맨 정성호씨 도움을 많이 받아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일을 다시 하면서 좌우명이 생겼어요. ‘남에게 누가 되지 말자.’ 그래서 출·퇴근길에 공부를 합니다.  
직업병인지도 모르겠어요. 지하철이 공부방 같거든요. 지하철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장소에요.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해요. 그래야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옛날에 분장은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 면박 당하기 일쑤였어요. 그런데 붓을 잡은 지 23년 만에 ‘특수분장 아티스트’로 인정을 받게 됐어요. 요즘은 우리 영화 산업이 발전해서 SF(공상과학)영화나 전쟁 영화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손으로 말해요" 나는 의료수화통역사 김선영입니다
김선영 씨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의 의료수화통역사다. 의료진과 청각장애 환자 사이에서 수화로 '통역'을 하는 게 그의 일이다. 국내 청각장애인은 약 27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3차(상급종합) 병원 가운데 의료수화통역사가 있는 곳은 신촌 세브란스 병원 한 곳뿐이다. 김 씨는 전임자가 병원을 떠난 지난 3월부터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환자와 의료진 사이에 의사소통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진료와 치료가 불가능해요. 가령 엑스레이를 촬영한다고 쳐요. 환자가 어디가 불편한지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면, 엉뚱한 곳만 찍을 수 있잖아요.”  
말을 못 들으면 글로 대화(필답)를 하면 되지, 뭐가 어려운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선영 씨는 “청각장애인에게 표음문자인 한글은 장벽이 높은 언어”라고 말한다. ‘가·갸·거·겨’ 같은 소리와 의미를 연결시켜야 하는데, 실제 음을 듣지 못하니 말을 익히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번은 어떤 농인 환자분이 병원을 찾아왔어요. 환자분 말씀이 '밥도 잘 먹고 화장실도 잘 가는데 병원에서 소화제를 줬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몸 상태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에요. 정밀 검사를 하니 심장질환이 발견됐어요. 그것도 까딱 했으면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는 응급 상태였어요. 환자가 자신의 몸 상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니, 의료진에게 ‘배가 아프다’ 정도의 의미만 전달된 거에요. 의료진의 오진이 아니라, 환자와 의료진 사이에 의사전달이 제대로 안 돼 벌어진 일이었어요.”


인터뷰 원문 보기
[직업의 정석] "손으로 말해요" 나는 의료수화통역사 김선영입니다
나는 왜 일하는가
“일을 왜 하냐고요? 왜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야 일을 해야 하는지 수화통역을 하면서 알게 됐기 때문이예요. 퇴원해 집으로 돌아가는 농인 환자분들을 보면 너무 즐거워요. 제가 정말 부족한데, 저에게 고맙다고 하시잖아요. 그간 이분들은 얼마나 (수화 통역이) 간절했던 걸까요.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도움이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람을 느껴요. 일을 하면 할수록 내 힘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자분들에게서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요.  
‘열심히 해서 성장할거야’하는 생각이 언젠가는 꺾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까지는 ‘계속 노력해야겠다,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어요.”
 
'하늘 높이 훨훨~' 나는 하늘을 나는 보더 박진민입니다
[사진 에버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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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민(28)씨 직업은 플라이보더. 제트스키 엔진이 뿜어내는 추진력으로 말 그대로 ‘보드를 타고 물 위를 나는 일’을 한다. 두 발로 수압을 견디고 흡사 아이언맨처럼 하늘을 날아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제비돌기를 하는 플라이보드는 국내에 알려진 지 몇 년 안 된 신종 스포츠. 2011년 프랑스의 발명가 프랭키 자파타가 고안했다.  
박씨는 지난 6월 프랑스 카발레르 쉬르 메르에서 열린 월드챔피언십에서 여자 부문 1위에 오른 세계 최정상 선수다. 올 여름 주말마다 하루 3번씩 캐리비안베이에서 공연을 했다. “한 번 타고나면 힘이 빠져서 아무 것도 못해요. 따로 운동도 안하는데 많이 먹어도 살이 안쪄요. 그래서 극한직업이라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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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말 잘 듣던 박진민씨의 ‘반란’은 대학 입학과 함께 시작됐다. 덕원예고를 졸업하고 경희대 한국화과에 진학한 그는 덜컥 스키 동아리에 가입했다. ‘학과 내에 있는 동아리가 싫다’는 이유에서였는데, 그 길로 스키에 푹 빠졌다. 여름엔 수상 스키, 겨울엔 스노우 스키를 탔다. 학교를 졸업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이 됐다. 방학이 되면 스키장에서 살다시피했다. 2014년 여름. 스키 선수들이 우리와 계절이 정반대인 뉴질랜드로 전지훈련을 떠난다는 소리에 마음이 동했다. 프로 선수는 아니었지만 훈련을 받아보고 싶었다.  

 
덜컥 학교에 사표를 냈다. 2년간 모은 돈을 들고 3개월짜리 훈련을 따라갔다.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방학 때마다 타고 싶은 스키 실컷 하면 되지 않냐. 안정적인 선생님을 왜 그만두냐”는 것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던가. ‘싸워 이긴’ 그는 훈련을 떠났다. 
[사진 에버랜드]

[사진 에버랜드]

2015년 어느 날 수상 스키를 타는 그에게 운명처럼 플라잉보드가 다가왔다. 베테랑부문 챔피언 양동원 감독이 그에게 플라이보드를 한 번 타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물 위로 최고 20m를 날아오르는 플라이보드는 신세계였다. 

“선생님은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플라이보드는 체력이 있는 지금 해야만 가능한 스포츠잖아요. 사실 부모님께 감사하죠. 집에 빚이 있거나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없었으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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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하늘 높이 훨훨~' 나는 하늘을 나는 보더 박진민입니다
나는 왜 일하는가
 대학 졸업 후 두어달을 그야말로 백수로 지낸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이 한창 구직활동에 나설 때였다. 뭘 할지 모르겠어서 집에 머물기 시작해 낮밤을 바꿔 살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일어났다. 그러고는 하루종일 밥먹고 TV만 봤다. 놀면 속 편하고 좋을 것 같았는데 자꾸만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었던 것 같아요. 계속 밑으로 내려가는 기분,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할까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때 알았어요. 아, 나는 일을 해야 하나보다라고요.”  
그래서 집을 나섰다. 동대문 새벽시장에서도 일을 하고, 인터넷 쇼핑몰이라도 차려보려 학원도 다녔다.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도 했다. 몸은 피곤해도 일하는 것이 훨씬 행복했다. 그러다 2012년 9월 선생님이 됐다.  
“저는 노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일을 안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저는 반대더라고요. 일을 안해보니까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저는 일을 안하면 슬퍼지는 사람이었어요. 아주 먼 미래의 일인데, 사람들이 와서 재미있게 놀다갈 수 있는 섬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디즈니랜드처럼 섬 안에 테마파크를 만드는 거에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을 만들면 행복할 것 같아요. 지금은 상상 불가능한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걱정부터 하진 않으려고요. 어떻게든 길은 열리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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