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대륙의 파워엘리트]“공직자여, 출세하려거든 변방으로 가라”

중국 리더의 미래를 볼 때 과거 그들의 근무 지역을 보면 대강 그림이 나옵니다. 우선 베이징과 상하이, 톈진과 충칭 등 이른바 4개 직할시 서기에 오르면 정치국원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직할시의 위상이 반영된 중국 권력의 관례지요. 그리고 경제 중심지인 광둥과 저장성 서기를 거쳤다면 최소 중앙위원 가능성이 큽니다. 국가의 젖줄인 거대 경제를 경영한 이력이 국가 살림을 챙기는데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두 지역이 있는데 티베트, 즉 시장 자치구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입니다. 이 두 지역에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티베트족과 위구르 족이 많이 거주하는데 끊임없이 독립을 추구하고 있어 공산당이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으로선 안보적 차원, 즉 국가 핵심 이익과 관련된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 능력을 보고 지도자들의 위기관리 리더십을 가늠합니다.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이 (1988~1992년) 시짱 자치구 시절 현지 독립 세력에 대한 잔혹한 유혈 진압으로 덩샤오핑에게 발탁된 게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시짱이든 신장이든 고난의 길이지만 잘만 하면 자신의 출세를 보장받는 보증수표가 됩니다. 물론 못하면 '꽝'이지만 권력의 역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은 고난에서 단련되고 배양된 법이지요. 
신장 자치구 운동 선수들을 격려하는 천취안궈 [사진 CCTV 망]

신장 자치구 운동 선수들을 격려하는 천취안궈 [사진 CCTV 망]

한데 이 두 지역을 다 거치면서 시진핑 시대 주목을 받는 리더가 있습니다. 현재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서기를 맡고 있는 천취안궈(陳全國·62). 그는 그 어렵다는 시짱 자치구 서기(2011~16년)가 끝나자마자 신장으로 이동해 현지 독립 분자들과 일전을 벌이고 있지요. 아직까지는 큰 무리 없이 현지 관리를 잘해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 승진이 유력합니다. 물론 그가 이 두 지역에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차기 정치국원에 오르는 건 아닐 겁니다. 그만큼 남다른 능력과 리더십이 있겠지요.
 
천취안궈는 1955년 11월 허난(河南) 성 핑위(平輿) 현에서 출생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3년 인민 해방군에 입대해 문혁의 험한 꼴을 경험합니다. 권력이 잘못하면 백성들에게 어떤 고통이 돌아가는지를 철저하게 목격하고 경험했다고 합니다. 문혁이 종료된 이후 1977년 그는 제대해 허난성 주마뎬(駐馬店)구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공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다음 해 대학입시가 부활됩니다.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입시 공부를 했고 1978년 정저우(鄭州) 대학 경제학과에 당당히 합격합니다.
시짱 자치구 서기직을 떠날 때 천 서기(우)를 환송하는 주민들 [사진 봉황 쯔쉰]

시짱 자치구 서기직을 떠날 때 천 서기(우)를 환송하는 주민들 [사진 봉황 쯔쉰]

졸업 후 그는 핑위현 신뎬(辛店) 공사 직원, 주마뎬구 판공실 비서, 주마뎬구 부비서장, 허난성 수이 피아(遂平) 현 서기, 허난성 핑딩산(平頂山) 시 조직부 부장을 거쳐 1996년 허난성 뤄허(漯河) 시 시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리고 1998년 허난성 부성장에 오르면서 리커창이라는 인생의 귀인을 만나게 됩니다.
 
리커창 총리는 당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에서 허난성 성장으로 이동해왔습니다. 지방 경험이 없었던 리커창은 현지 사정에 밝은 원군이 필요했지요. 이때 허난성 부성장이었던 천취안궈는 아낌없이 리에게 충성을 합니다. 당시 43세였던 천취안궈는 허난 성에서 태어나 허난 성에서만 공직 생활을 한 현지 터줏대감이었습니다. 더구나 둘은 1955년생으로 동갑으로 서로 친근감을 더했습니다. 때로는 상하 관계로, 때로는 친구로 둘은 그렇게 인연을 쌓고 서로의 복심이 됩니다.
 
공청단의 핵심 권력인 리커창은 2002년 허난성 서기로 승진하고 이듬해인 2003년 천취안궈도 허난성 부서기에 올라 리를 보좌합니다. 이후 천은 2004년까지 허난 성에서 6년 동안 리커창과 보조를 맞추지요. 이때 둘의  관계는 형제보다 진한 전우를 방불케 했다고 합니다. 이후 리커창은 랴오닝(遼寧) 성 서기로 이동했고 천은 허난성 부서기직을 수행하며 리커창의 중원 굴기(중원지역의 경제적 부흥) 전략을 관리합니다. 리커창의 대권에 행여 누가 될 수 있는 일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을 한 거죠.
 
리커창은 2007년 제17대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며 사실상 차기 총리로 자리매김합니다. 그 뒤에는 공청단 직계 선배인 후진타오 주석이 있었습니다. 공청단 출신이 아니면서도 리커창과의 인연과 신뢰로 준 공청단원이 된 겁니다. 예상대로 2009년 천취안궈는 허베이성 성장, 그리고 2011년 8월 정치국원으로 가는 핵심 코스 중 하나인 시짱 티베트 자치구 서기로 영전합니다. 사실 그가 2011년 허난성 성장을 마치고 다음 임지를 고민할 때 리커창 당시 부총리가 강하게 시짱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시짱 자치구 군부대를 시찰하는 천취안궈 서기 [사진 위젠베이징]

시짱 자치구 군부대를 시찰하는 천취안궈 서기 [사진 위젠베이징]

시짱에 도착한지 4일 만에 천은 라싸(拉薩) 시의 루고(魯固) 지구를 방문해 주민들과 만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저는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라싸의 시민입니다. 저는 앞으로 이곳에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방문해 자주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저는 반드시 모두와 함께 생각하며 고민을 나누고 공산당 중앙을 받들어 더욱 살기 좋고 풍요로운 시짱을 만들어나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지요. 현지 티베트 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근본적인 시짱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하기야 손자병법에도 그런 말이 있지요. 무릇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심전이 상책이고 병전이 하책이다. (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
 
사실 그의 이 같은 스킨십 전략은 그의 전임자였던 장칭리(張慶黎) 서기가 보여줬던 강경 일변도의 정책과의 차별화를 고려한 겁니다. 동시에 강경에서 유화로의 전략적 조정에서 오는 충격 효과를 노렸던 겁니다. 중국판 햇볕정책이었던 셈이지요. 천의 예상대로 이후 5년간 티베트에서 무장 투쟁은 감소했고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는 시진핑 주석 시대에도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합니다. 2016년 8월 그가 티베트를 떠나 신장 자치구로 이동해 다시 국가 핵심이익과의 전쟁을 시작한 이유일 겁니다. 양광 넘치는 중앙의 핵심 요직보다 변방에서 '권력의 칼'을 갈고 있는 천취안궈 서기입니다.  
2013년 양회에서 시짱 고승을 시진핑 당시 총서기에게 소개하는 천취안궈(中) [사진 신화스뎬]

2013년 양회에서 시짱 고승을 시진핑 당시 총서기에게 소개하는 천취안궈(中) [사진 신화스뎬]

2017년 8월 실시된 19기 정치국원 예비 경선 투표에서 천취안궈의 득표율은 상위 25위에 들어 10월 18일 열리는 당 대회에서의 영도자 반열(정치국원)에 오를 가능성이 한층 커졌습니다. 예비경선 투표에는 18기 중앙 및 후보 중앙위원과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 각 부서 담당자, 각 지방의 당정 책임자 등 512명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는 누가 뭐라해도 리커창 현 총리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과 대척점에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발휘한 국가 핵심이익 수호 능력까지 권력의 대척점으로 끌어들이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분배와 조화, 그리고 타협이 가져온 중국 권력의 긍정적 속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차이나랩 최형규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