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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진량(萬國津梁)의 종

유주열전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유주열전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만국진량의 종
최근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과거 류큐(琉球)국의 왕궁이었던 슈리성(首里城)을 가 보았다. 1941년 오키나와 전쟁 통에 불타고 지금 건물은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 슈리성에는 특별한 종(鐘)이 걸려 있었다는데 전쟁 통에 미군의 공격을 받고 불타 종의 기능을 잃고 현재는 오키나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슈리성 내에는 모조품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 종에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첫 구절이 이러하다. “류큐(琉球)라는 나라는 남해의 아름다운 경승지로 삼한(三韓)의 우수함을 모두 갖추었고, 중국(大明)과는 보차(輔車 아래턱뼈와 잇몸)관계이고, 일본(日域)과는 순치(脣齒 입술과 치아)관계로 두 나라 사이에서 솟아난 봉래도(蓬萊島 신선이 사는 낙원)이다. 배(舟)와 노(楫)로서 만국의 가교(津梁)가 되어 각종 물산과 보물이 가득하다 ”
 
 琉球國者南海勝地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以日域爲脣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以舟楫爲萬國之津梁異産至寶充滿
 
 류큐국 건국 30년 1458년에 주조되었다는 이 종은 명문을 따라 ‘만국진량(萬國津梁)의 종’이라고 부른다. 류큐국이 섬 전체를 통일하여 칼과 창을 녹여 만든 평화의 종이라고 한다. 이 종의 명문 첫 구절 첫 문장에 중국과 일본에 앞서 삼한(三韓)을 먼저 내 세웠다.
 류큐국은 남북으로 중국과 일본과는 비슷한 거리에 놓여 있지만 한반도와는 두 배 이상의 먼 거리에 있음에도 명문에 삼한의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삼한 출신의 한 사람으로 류큐국과 특별한 인연을 느꼈다.
 
 삼별초와 류큐국  
 류큐국에 우리 선조들이 일찌기 정착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조선조 500년간은 바다를 기피하였으나 우리 민족은 본래 해양민족이었음이 여러 역사 자료에 나온다. 통일 신라의 어수선한 시기에 한반도 남해와 일본 연안에는 항해 기술이 높은 신라해적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것도 이러한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류큐국이 만국진량의 종을 통해 삼한과 특별한 관계를 밝힌 것으로 보아 삼한 출신이 통일 류큐국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류큐국과 고려 말 삼별초(三別抄)와의 관계에 대해서 들은 것 같기도 한다.
 1231년 몽골(元)의 침략에 저항하여 강화도를 근거로 항몽을 계속하던 고려의 무신정권이 1270년 원종이 귀국하면서 원에 복속, 개경으로 환도하려고 하자 무신정권의 엘리트 근위병이었던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였다.
 원종에 대한 설득이 실패하자 삼별초는 새로운 왕을 추대하여 강화도의 각종 재물과 사람들을 실은 대 선단을 이끌고 남해안 진도로 이동했다. 삼별초는 해상력을 기반으로 제주도를 포함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여 항몽 항쟁을 하였다. 1271년 새로이 조직된 여몽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진압되자 삼별초 잔존 세력이 제주도(탐라)로 건너가 항쟁을 계속하였다.  
 삼별초는 당시 일본의 가마쿠라 무신 정권에 외교서한을 보내 항몽 공동전선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73년 삼별초는 제주도에서도 버티지 못하고 여몽연합군에 궤멸되었다. 4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실패였다. 역사는 거기까지다.
 바다에 익숙한 삼별초가 쉽게 항복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제주도로 몸을 피했으나 여몽 연합군에 맞설 수 없음을 알고 대 선단을 준비 진도와 제주도 사람들을 싣고 남중국해의 갈라파고스로 알려진 류큐로 집단 이민을 하였으리라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더욱이 오키나와에서 출토 된 고려기와에 제작연대(계유년 1273)와 함께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명문(高麗瓦匠造)이 새겨져 있다. 연도로 보아서는 삼별초의 세력이 류큐에 도착한 시점과 비슷하기 때문에 삼별초와 류큐를 연결하는 실마리가 된다.  
 고고학의 발달로 더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 좋겠지만 전문 작가들은 이 정도의 단서만으로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삼별초의 집단 이민과 류큐국의 관계를 대하드라마로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과문한 탓인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동중국해로 뻗어 나간 한인(韓人)
 오키나와는 청정 바다에 둘러싸인 낙원으로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만국진량의 종 명문속의 삼한에 생각이 꽂혀 아름다운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날 저녁 호텔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백제를 건국한 동생 온조에게 패배하여 역사에서는 사라진 비류의 무리들이 일본으로 건너 가 오늘의 일본 건국의 기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삼별초의 무리들이 역사에서는 사라졌지만 이곳으로 내려 와 류큐국 건국의 기원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고려의 정예무인 집단인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도에서 밀리면서 제주도로 후퇴했지만 제주도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진도를 떠날 때 류큐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려는 벽란도를 통해 흑조(黑潮 구로시오) 해류를 통해 멀리 이슬람과 동남아 제국과 무역을 하였고 후에는 류큐인이 동남아와 고려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을 담당하였다.
 강화도는 예성강 하구 벽란도와 마주보고 있다. 항몽 40년의 강화도 시대에 고려무신 정권은 류큐인과의 교류가 많았을 것이다. 무역상 류큐인 속에는 한반도 출신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삼별초의 지도자들은 먼 남쪽 바다에 류큐가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신라에 의한 3국통일로 백제가 멸망되면서 해양강국이던 백제인들은 신라의 통치를 거부하여 대거 중국의 동남해안에 이주 신라방을 만들었다. 중국의 산동성과 강소성이 중심이었지만 남쪽으로 절강성과 복건성까지 신라방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류큐에도 신라방이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 어렵지 않다.  
 지구의 무역풍은 위도 0도에서 30도까지는 북동쪽에서 남서쪽로 바람이 불고 30도가 넘으면 편서풍 영향으로 바람이 바뀌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다. 무역풍으로 한반도에서 류큐로 내려가고 류큐에서는 흑조와 편서풍으로 한반도에 도달할 수 있다.
 
 탐라(제주도)에서 기획이민
 탐라는 류큐까지 한결 가까운 길목이다. 삼별초로서는 여몽연합군에 밀려 어차피 탐라를 떠나야 하므로 탐라에서 집단 기획이민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최고의 조선 기술을 가진 고려 장인들이 튼튼한 배를 준비하고 백공(百工)이라고 부르는 수 백 명의 각종 전문가들을 배에 태웠을 것이다. 물론 집을 짓는데 필요한 기와 장인은 당연히 포함되었다.  
 그들이 류큐에 도착했을 때 류큐는 지방 호족이 난립하고 있었다. 고려무인의 무예와 선진 기술을 갖춘 고려 이민집단은 간단히 지방 호족을 제압하고 한 지역을 차지했을 것이다. 고려와 무역을 주도했던 류큐의 신라방 출신들이 삼별초의 집단이민을 맞이하고 그들의 정착을 도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류큐에는 고기잡이 방식과 돼지 사육에 제주도 풍속이 많이 엿 보인다고 한다.
 1392년 본국에서는 고려가 망하고 고려 무인의 한사람인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다. 삼별초의 후예들은 여기에 자극을 받았다. 몽골(元)이 약해지면서 친원의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었으니 산재하고 있는 류큐도 통일해 외적의 침공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당시 류큐는 삼산(三山)시대였다. 오키나와의 특산물 고야(여주)처럼 길쭉한 섬에서 북산 중산 남산 세 나라가 정립(鼎立)되어 있었다.
 
 류큐국의 친한(親韓) 외교
 삼별초의 후예들은 중산(中山)의 호족 상(尙 일본어로 쇼)씨를 도아 중산에 의한 통일 왕국이 건국되는데 일조를 한다. 1429년도 였다. 상씨는 중국에서 건너 왔다는 설이 다수설이지만 신라의 통일로 백제가 망하면서 백제의 명문가 목천 상씨들이 백제 부흥 운동을 한 기록이 있어 목천 상씨들이 부흥운동에 실패하자 류큐에 이주하였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어쨌든 상씨가 전국을 통일하고 류큐국을 세웠다.  
 류큐국은 독립왕국으로 조선에 조공을 보내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왜구에게 팔려 온 포로들을 보내주기도 하고 조선 초 1416년 류큐국에 파견된 통신사 이예(李藝)를 통해 조선인 포로 44명을 쇄환시켰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웃 일본과 중국과는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포르투갈인 등 서양인이 들어오기까지 중계무역으로 다대한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국제정세는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을 통일하여 대륙 침략의 야망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게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면서 조선을 침략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이다. 도요토미는 류큐국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류큐국은 조선과 교린국 사이임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당시 명의 무능한 황제는 조선을 불신하여 조선이 일본과 함께 명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있었다. 베이징에 체류중이던 류큐국의 사절이 일본과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여 황제의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명의 항왜원조(抗倭援朝)의 참전을 끌어내어 멸망 직전의 조선에게 재조(再造)의 기회를 준 것은 류큐국의 친한 외교의 결과인 셈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류큐국 징벌(懲罰)
 임진왜란 당시 류큐국의 친한 외교를 불편하게 생각한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이 끝나자 류큐국에 대한 징벌전쟁을 일으켰다. 도요토미 이후 일본을 지배한 도쿠가와 이예야스(德川家康)는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현)에 지시하여 류큐국을 침공 징벌하도록 하였다. 1609년의 일이다. 일본군은 7년간 조명 연합군과 싸운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류큐국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여 중국과 함께 일본에게도 조공을 바치는 중일양속(中日兩屬)관계가 된다.  
 류큐국의 내정은 사쓰마 번이 계속 장악하다가 1867년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유신이 일어나고 사쓰마 번이 가고시마현으로 바뀌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이 1871년 시행된다. 1879년 류큐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오키나와현으로 바뀌면서 450년간의 류큐왕국은 막을 내린다.
 
 
만국진량의 오키나와
 아침에 눈을 떴으나 지난 밤 꿈속의 류큐국은 사라지고 오키나와의 깨끗한 공기와 밝은 햇살이 눈부시다. 오키나와에 과거 누가 살았는지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여러 민족이 각자의 사유로 각지에서 흘러들어 와 훌륭한 섞어찌개가 되어 오키나와를 발전시켜 온 것을 틀림이 없다. 지금도 오키나와의 무공해 자연의 아름다움에 일 년 내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700년 전의 예언대로 만국진량의 오키나와는 세계인을 서로 연결하는 가교가 되고 파라다이스(현대판 봉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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