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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는 그 자체가 예술...거기에 가해자가 돼선 안 돼죠"

김민정,Insight, 2017,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96.5 x 139cm

김민정,Insight, 2017,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96.5 x 139cm

 한지를 오리거나 얇게 자른다. 그 테두리를 향불로 한 점 한 점 태운다. 마치 명상과도 같은 정성스런 과정을 거쳐 한 조각 한 조각 첩첩이 붙여간다.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김민정(55) 작가의 기법은 작품을 아주 가까이 보지 않고는 알아채기 힘들다. 멀리서 보면 기하학적 형태나 조형적 리듬감부터 눈에 들어온다.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 ‘종이, 먹, 그을음:그 후’는 90년대 초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작가가 26년 만에 국내 상업화랑에 여는 개인전이다.   
김민정, Phasing, 2016,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28 x 40.5cm 사진=현대화랑

김민정, Phasing, 2016,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28 x 40.5cm 사진=현대화랑

김민정 작가의 '페이징'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의 부분. 먹을 떨어뜨려 빚어낸 형상을 따라 향불로 태우는 등 비움과 채움을 겹쳤다. 사진=이후남 기자

김민정 작가의 '페이징'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의 부분. 먹을 떨어뜨려 빚어낸 형상을 따라 향불로 태우는 등 비움과 채움을 겹쳤다. 사진=이후남 기자

 전시장에 자리한 또 다른 신작 ‘페이징’ 시리즈는 붓으로 먹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마치 서예를 하듯 힘차게 내리그은 형태가 한결 자유로운 동시에 동양적으로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매번 각각의 형태에 그림자라도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 테두리 안쪽을 태워 속을 비우고 다른 한편에선 온전한 형태를 다시 채워 미묘하게 어긋나도록 종이를 겹쳤다.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우고 싶었을까. 전시 개막 뒤 집에 돌아간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지금껏 구축한 예술세계의 공을 종이, 다름 아닌 한지에 돌렸다.
'페이징'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 앞에 선 김민정 작가. 사진=현대화랑

'페이징'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 앞에 선 김민정 작가. 사진=현대화랑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인쇄소를 했는데 자르고 남은 종이로 딱지 같은 걸 만들고 놀았어요. 아, 나는 그렇게 하던 걸 지금도 하는구나 싶어요. 90년대 유럽은 굉장히 역동적이었어요. 아이구 모르겄다, 나는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거를 해야겠다 싶었죠. 우리는 종이를 잘 알아요. 서양사람들은 한지 같은 건 더더구나 모르죠. 다만 서양에 있으면서 미학적 형상은 그래픽적인 것도 보고 해서 서양의 미학이 들어간 거죠. ” 처음부터 머리로 작정한 게 아니라 “왜 이걸 했지" 하며 나중에 돌아보니 그렇더라는 얘기다.  
김민정, Order-Impulse, 2017,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48 x 48cm

김민정, Order-Impulse, 2017,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48 x 48cm

 그는 한지를 두고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그 자체가 미니멀 아트”라며 “제가 그걸 마구 다루는 가해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무리 갈필을 해도 종이가 결정해요. 나도, 붓도, 먹도 아니에요. 우리나라 한지가 꼭 와인 같아요. 닥나무라서 가물 때, 비가 많이 왔을 때, 종이 성격이 다 달라요. 수십 년 쓰다보니 알게 됐죠. ” 촛불 대신 향불을 쓴 것도 질 좋은 얇은 한지에 가는 선을 구현하고 싶어서였다. “거꾸로 그렇게 하다 보니 명상이 된 거죠. 딴 생각을 하거나 잡념이 있으면 타버리니까.” 두께가 다양한 한지를 붙이는 일도 물처럼 푼 풀에 둥둥 띄워 핀셋으로 집어 옮기는 조심스런 과정이란다.  
김민정, Predestination, 2013,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74 x 115cm

김민정, Predestination, 2013,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74 x 115cm

  한지는 한국 올 때마다 한껏 사가되 배접은 학교 시절 배운 것을 살려 직접 하거나 고향에 보내 배접을 배우게 한 유럽인 조수의 손을 빌린다. 그는 광주광역시에서 나고 자라 홍익대 미대 학부와 동양화과 대학원을 나왔다. 전시장에는 색색의 한지가 한결 밝게 어우러진 작품들도 눈에 띈다. “30대, 40대에 여자로서 행복한 게 많았고 붕 떠 있기도 했고. 그런 게 반영이 되나 봐요. 지금은 저에게 좀 더 엄격해지면서 색이 없어지는 것 같고.”   
김민정, Red mountain, 2016, watercolour on mulberry Hanji paper, 37.5 x 44cm

김민정, Red mountain, 2016, watercolour on mulberry Hanji paper, 37.5 x 44cm

  향불 대신 단색의 색채만 활용, 농담을 달리해 첩첩이 칠한 시리즈 ‘마운틴’도 명상적이다. ‘마운틴’과 ‘페이징’시리즈를 포함, 그의 작품 세 점이 최근 영국박물관 한국관에 소장됐다. 내년초에는 영국의 이름난 갤러리 화이트 큐브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미술관에서도 사고, 개인 콜렉터들도 많이 사고, 뭔가 인정을 받으니까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아요. 이거였을까, 머나먼 나라까지 와서 망망대해 같은 데서 수 십 년 보낸 게 이거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다시 리바운드하겠지만."
 유학길에 ‘아티스트로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던 어머니 말에도 이제는 부끄럽지 않게 된 터인데 그는 “예술가라는 거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예술을 하고 있는데 단지 우리는 화랑에 걸고, 뮤지엄에 걸고, 그러는 거죠.” 대화 내내 전화 저편에서 글로 옮기기 힘든 전라도 억양의 감칠 맛이 묻어났다. 통화 도중 누가 왔는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낭랑한 불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릴 때야 지금 그가 사는 곳이 프랑스란 실감이 났다. 이번 전시는 10월 8일까지.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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