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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역사를 만드는 용기

이상언 사회2부장

이상언 사회2부장

“개 세금, 담배 세금, 자동차 세금, 환경 세금…. 선거는 끝났고, 당신은 이제 잘리지 않는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훌륭함이다.”
 
2002년 독일에서 유행한 패러디송, ‘세금 노래(Der Steuersong)’다. 코미디언 엘마르 브란트가 스페인 댄스그룹의 노래 ‘케첩송’ 멜로디에 노랫말을 붙여 만들었다. 그해 총선에서 연임에 성공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사회민주당·녹색당 연립정부의 조세정책을 겨냥한 노래였다.
 
선거운동 때는 증세가 없다고 얘기하고선 재집권하자 슬그머니 간접세 인상 카드를 꺼내 든 정부를 비꼬는 이 노래에 독일인은 열광했다. 100만 장 넘게 앨범이 팔렸고, 그해 연말에는 인기 노래 순위 1위를 차지했다. 3년 뒤 슈뢰더 정부가 무너졌을 때 이 노래 유행을 비극의 시발점으로 보는 이가 많았다.
 
사실 개 세금 문제에 관한 한 슈뢰더는 억울하다. 독일에는 반려견 세가 있다(반려묘 세는 없다). 지방정부 관장사항이다. 연방정부가 올리라 내리라 할 일이 아니다. 슈뢰더 집권 이전 여러 지역에서 도입된 제도이기도 하다. 반려견 세는 마리당 대략 15만원 안팎(지역·크기·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음)이다. 이에 불만을 가진 반려견 주인이 꽤 있다. 개가 아니라 양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하여튼 이 세금과 슈뢰더는 별 상관이 없었다.
 
‘팩트’가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래가 흥행한 이유는 간단하다. 슈뢰더의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지지율이 상당히 떨어져 총선에서 간신히 승리했는데 이후 내놓은 정부 보조금 삭감 등의 정책으로 서민의 반발을 샀다. 당시 이웃 나라 프랑스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바다 건너 영국에는 매력적인 국제 스타 토니 블레어 총리가 있었다. 이들에 비해 슈뢰더는 무디고 답답해 보였다. 통독 후유증으로 경제 성장이 멈추고 실업률이 치솟던 때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슈뢰더는 ‘어젠다 2010’이라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2003년 4월의 사민당 서부지구 전당대회에서였다. 어젠다는 일곱 가지였다. 노동시장 개혁, 기업별 단체협약 확대, 직업교육 개선, 의료보장 개혁 등이 들어 있었다. 경영자총협회에서는 즉각 개혁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비판했고, 노동조합총연맹은 철회를 요구하며 조직적인 반대운동에 돌입했다. 사민당의 정치적 기반인 노조로부터 ‘사기꾼’ ‘배신자’ 소리를 들었지만 슈뢰더는 야당인 기독교민주당과 협상을 벌여 가며 그해 말까지 어젠다 2010과 연관된 개혁법안들을 모두 통과시켰다.
 
그로부터 그가 정치권에서 퇴출되기까지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방선거에서 참패해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고, 2005년 9월 실시한 조기총선에서 의석을 크게 잃어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에게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슈뢰더는 실패한 정치인의 상징이 됐다. 그는 7년간 총리 자리에 머물렀다. 전임자였던 헬무트 콜은 16년 재임했고, 후임자인 메르켈은 12년째 집권 중이다. 프랑스의 시라크는 12년, 영국의 블레어는 10년간 권좌를 지켰다. 슈뢰더는 퇴임 후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한 영국계 투자은행과 러시아 재벌 가스프롬의 고문이 돼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최근 몇 년 새 화려하게 부활했다. 국제행사 초청이 줄을 잇고, 2007년에 출간된 그의 회고록이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최근 한국어판(『게르하르트 슈뢰더 자서전-문명국가로의 귀환』) 출판기념회 참석 차 방한한 그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에서 눈물 닦는 모습을 보여 한국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4년 전 한 연설에서 “리더십이란 희생을 감수하고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힘”이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봄에 그를 이렇게 칭송했다. “어젠다 2010으로 새 시대의 문을 열게 해 준 전임 슈뢰더 총리께 감사드린다.” 미래를 위해 정치 생명을 건 지도자, 정적이었던 전임자의 공을 과감하게 인정하는 또 다른 지도자. 그들은 이렇게 역사를 만들어 간다. 부럽다.
 
이상언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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