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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대로 해” 벤처 갉아먹는 짭스병

2017년 9월 XX일. 날씨: 하늘은 맑디맑은데 왜 내 눈엔 눈물이.
 
“내가 그냥 대표 된 게 아니잖아요. 월급 주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하세요.” 오늘도 들었다. 20대 때부터 “대표님, 대표님” 소리 듣다 보니 세상 참 만만해 보이고, 모두가 발 아래로 보이겠지.
 
내가 남들이 다 가고 싶어 가는 대기업에 다니다 2년 전 스타트업으로 이직하자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꼰대들 짜증나요. 나도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은데 용기가 잘 안 나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도 그랬다. 번듯한 회사에 들어갔지만 신나지 않았다. 윗사람들 옛날 무용담 듣는 회식, 받아 적기 바쁜 회의, 힘들었다. 최고위 임원이 방문하는 날에 50여 명이 도열해 일일이 악수하는 모습은 블랙코미디였다. 그래서 옮겼다. 스타트업(start-up)이 내뿜는 ‘아우라’에 혹해 적극적으로 구직했고, 강남의 한 회사에 입사했다. 처음엔 신세계였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어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회사 성과와 직결된다’는 자부심에 야근을 자청했다. 열정페이 아니냐고? 내가 주도한다는 성취감으로 보상은 충분했다. 하지만 딱 1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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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회사 워크숍을 기획했다. 의견을 모아 회사 근처 레지던스 호텔에서 와인을 마시는 행사를 준비했다. “별론데요. 그냥 제가 정할게요.” 대표는 한 칼에 잘랐다. 결국 우리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밤을 보냈다. 사실 그즈음부터 ‘이게 아닌데’ 하는 경우가 늘었다. 창업자는 프레젠테이션에만 능했다. 지시는 애매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노베이션, 크리에이티브, 엣지가 중요한 거 모르세요?”
 
모든 스타트업이 이렇지 않다는 것 안다. 하지만 이 업계에 ‘잡스병’이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회사가 희귀종은 아닌 모양이다. ‘짭스병’이라고도 불리는 이 증상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어설프게 모방하는 대표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물론 잡스와 같은 천재성은 찾기 어렵다. “내가 다 알아. 나만 따르면 돼” 식의 리더십이 곳곳에 묻어난다.
 
이런 상황이 업무와 연계되면 문제가 커진다. ‘코딩’을 모르면서 개발자에게 간섭하고, 인사와 마케팅에까지 ‘깨알’ 지시를 한다. 스타트업에선 수평적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느냐고? 한번은 출근하자마자 대표가 나를 부르더니 “요즘 불만이 많다면서요”라고 했다.
 
측근 중심 조직 … 채용도 알음알음으로 
 
며칠 전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다 농담 삼아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집은 언제 사지” 했던 게 대표의 귀에 들어간 거였다. 회사는 대표의 최측근, 측근, 추종자로 서열화돼 있다.
 
채용 시스템도 문제다. ‘대표 맘대로’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개 스타트업은 친구·선후배 등 주변 인맥과 함께 시작한다. 기업 규모가 커지면 시스템에 따라야 하는데 여전히 알음알음 채워 간다. 대표가 나온 서울대나 KAIST 후배만 뽑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번은 대표에게 왜 그런지 물어봤더니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우리 학교 애들이 똑똑한 건 이미 검증된 거잖아요.”
 
2003년부터 10곳의 스타트업을 거친 선배의 경험도 비슷하다. 그는 나름 중견이지만 여전히 대표로부터 “너 이 업계에 다시는 발 못 붙이게 할 거야”라는 농담을 듣는다고 한다. 실제로 그 대표는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업계는 좁다.
 
스타트업이 마냥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특유의 매력은 분명히 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여 열정적으로 신사업을 개척하는 곳도 많을 거다. 2011년 6만5000개였던 신설 스타트업이 지난해 9만6000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스타트업 ‘붐’이라 할 만한데,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나는 자율과 창의라는 멋진 세계를 꿈꾸며 택한 이곳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를 오늘도 고민한다.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지난 6월 스타트업 근무 경험자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775명이 그만둔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평균 근속연수는 21개월로 대기업(10.4년)과 비교도 안 된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홍상지·김준영·하준호 기자 hongsam@joongang.co.kr
 
※ 이 글은 스타트업계에서 14년간 근무한 송모(38)씨, 4년간 대기업에 다니다 2014년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김모(32)씨의 이야기를 일기 형태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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