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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남비서傳(5)] 김정은의 책사 김양건

김용순 대남비서의 후임은 김양건(1942~2015)이었다. 김양건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책사였다. 김일성-김책, 김정일-허담의 맥을 이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그의 장례식장을 찾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충실한 방조자, 친근한 전우였다”고 회고했다.  
 

김일성-김책, 김정일-허담의 뒤를 잇는
김정은의 책사로 7년간 대남비서 맡아
당 국제부에서 30년간 잔뼈가 굵어

싱가포르 비밀접촉 알려지면서 조사 받아
김정은의 신뢰로 당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교통사고로 사망했지만 타살설도 제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5년 12월 김양건 대남비서의 장례식장을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5년 12월 김양건 대남비서의 장례식장을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양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기 이전에 김정은의 ‘고명대신’으로 뽑혔다. 그가 선택된 것은 어느 파벌에도 속해 있지 않은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였기 때문이다. 김양건 외에 노동당 내부에서 또 다른 고명대신은 김평해 당 간부부장, 박도춘 전 군수담당비서였다.  
 
김양건이 대남비서에 임명된 것은 2010년이다. 2007년 통일전선부장에 오른 뒤 3년 만에 대남비서와 통일전선부장을 겸임하게 됐다. 김양건은 김일성종합대학 불어과를 졸업한 뒤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현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73년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지도원으로 선발됐다. 대외문화연락위원회는 56년 창설된 당 국제부 산하단체로 여러 나라에서 친북 저변 세력을 확대하고 미수교국에 대해 관계수립의 여건을 조성했다.
 
김양건은 77년부터 당 국제부 지도원으로 들어가 부과장, 과장, 부부장을 거쳐 20년 만인 97년 당 국제부장으로 승진했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당 국제부장으로 근무한 뒤 2007년 통일전선부장으로 옮겼다. 전임자 김용순과 같은 케이스였다. 통일전선부장은 김용순 대남비서가 2003년 사망한 뒤 4년 동안 공석이었다. 4년 동안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실상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김양건이 대남사업을 맡은 이후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2009년 싱가포르 비밀접촉, 2015년 8.25 남북고위급접촉 등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았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8.25 남북고위급접촉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겠지만, 싱가포르 비밀접촉은 그에게 시련을 안겨 주었다.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5년 8월 25일 남북고위급접촉 북측 대표로 참석해 공동발표문을 작성한 뒤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악수하고 있는 김양건 대남비서(사진 오른쪽).  [중앙포토]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5년 8월 25일 남북고위급접촉 북측 대표로 참석해 공동발표문을 작성한 뒤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악수하고 있는 김양건 대남비서(사진 오른쪽). [중앙포토]

김양건은 2009년 8월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단으로 김기남 비서(현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와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김기남은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김양건은 이를 진행하기 위한 사전 접촉으로 싱가포르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그해 10월 임태희 노동부 장관을 보냈다. 이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2015년 2월 발행)에 따르면 이 비밀 접촉은 북한의 지나친 요구(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 북한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로 중단됐다.    
 
김양건은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대로 가면 죽는다”며 싱가포르에서의 논의사항을 적은 쪽지에 임 장관의 사인을 받아갔다. 싱가포르 비밀 접촉 이후 그해 11월 개성에서 통일부-통일전선부의 실무 접촉이 열렸다. 북한은 싱가포르의 논의사항을 ‘합의문’이라고 우기며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결국 실무 접촉이 결렬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물 건너갔다.  
 
김양건은 『대통령의 시간』에 당시의 협상 내용이 공개되면서 2015년 2월 곤욕을 치뤘다. “그대로 가면 죽는다” 등의 표현이 북한의 입장에서 굴욕적으로 비쳤는지 국가보위성(한국의 국가정보원)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당시 김양건의 복귀에 관심을 쏠렸다. 하지만 그는 2015년 2월 당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면서 오히려 존재감을 과시했다.    
 
김양건은 그해 12월 29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김용순 대남비서, 이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도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자동차가 적은 북한의 현실을 감안해 타살설도 끊임없이 제기됐다. 당시 김양건은 대표적인 대화파로 강경파들에게 ‘눈엣가시’였다.
 
김정은은 장례식에 참가해 눈물을 흘리며 “함께 손잡고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간다는 말도 없이 야속하게 떠났다”고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91년 5월 허담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린 것과 비슷했다.  
 
김정은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에서 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김양건을 허담·연형묵·김중린·김용순 등과 함께 호명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91년 5월 허담의 장례식장을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91년 5월 허담의 장례식장을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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