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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왕의 그늘막에서 우아하게 차 한 잔

설계사무소 stpmj는 전통 차일을 새롭게 만들어 한옥 처마에 달았다.[사진 아름지기(이종근)]

설계사무소 stpmj는 전통 차일을 새롭게 만들어 한옥 처마에 달았다.[사진 아름지기(이종근)]

가을볕은 고맙다. 여름볕처럼 이악스럽지도, 겨울볕처럼 인색하지도 않다. 서울 통의동에서 열리고 있는 2017 아름지기 기획전 ‘해를 가리다’는 가을볕을 전통의 운치, 현대의 감각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체험형 전시다. 우리네 선조들이 해를 가릴 때 썼던 건축적 시설을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집공방이 각종 사료에 바탕해 만든 작품, 해가림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국내 건축가들 작품을 아름지기 사옥 실내외 곳곳에 설치해 선보인다.
 

2017 아름지기 기획전 ‘해를 가리다’
조선시대 해 가리던 어막차·차일 등
전통 방식 재현 … 체험할 수 있어
모든 관람객에게 커피·차 무료 제공
현대적으로 해가림 해석한 작품도

특히 1층 실내에 자리한 어막차는 첫눈에 봐도 단연 근사하다. 높은 분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막차’는 조선시대 왕이나 고관대작들이 궁중 의식 등에서 잠시 몸을 쉬던 가설형 시설이다. ‘어’가 붙었으니 임금님용인 셈이다.
 
문헌에는 어막차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 정조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수원 현륭원에 행차할 때 모습, 그 중 가장 중요한 행사였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해 베푼 진찬을 담은 그림에 등장한다. 동국대박물관이 소장한 ‘봉수당진찬도’에는 3면의 병풍 등 실내 장식까지 묘사가 세밀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화성원행의궤도’의 봉수당진찬도에는 콕 짚어 ‘어막차’라고 한글까지 적혀있다.
해가림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건축가그룹 SoA의 작품. [사진 아름지기(이종근)]

해가림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건축가그룹 SoA의 작품. [사진 아름지기(이종근)]

 
이를 연구해 온지음이 만든 어막차는 겉은 검박하되 안에는 앉는 자리 등 뒤에 책가도가 그려진 것을 비롯, 화려한 품격이 흐른다. 사방에 둘러치는 막도 안팎의 천과 색을 달리하고 안감은 무늬 섬세한 비단을 쓰는 등 외빈내화의 뜻을 담았다. 막을 내리면 밖이 가려지고 올리면 작은 정자처럼 시야가 트인다. 고급스런 휴식용 텐트나 캐노피인 셈이다. 조립과 운반이 쉽게 막차를 현대적으로 만든 실용형 텐트까지 곁에 선보여 의미를 한층 알기 쉽다. 어막차에는 관람객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아 잠시 임금님 기분을 내볼 수 있다.
 
야외에 설치된 작품에선 현대 건축 안에 한옥을 품은 아름지기 사옥의 매력이 한층 살아난다. 한옥 처마에 해를 가리는 차일을 흰색 노방으로 만들어 달았다. 건축가 이승택·임미정이 이끄는 설계사무소 stpmj의 솜씨다. 방수처리한 노방을 섞어 가벼운 비도 막는다. 해의 높이에 따라 그늘의 깊이는 물론 차일의 질감 덕에 그늘의 밀도가 달라지는 효과를 더했다.
 
한옥에서 마주 올려다 보이는 3층 야외공간에는 온지음이 만든 독립형 차일이 자리했다. 해와 비를 고루 피할 수 있다. 전통적 방식의 차일이 때로는 기름 먹인 종이나 천으로 가벼운 방수기능을 갖추기도 했던 것을 참고해 만들었다. 이를 지탱하는 기둥은 검게 물들인 대나무 다발을 쓰는 등 전통을 살리려는 노력이 곳곳에 역력하다.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집공방이 의궤 같은 조선시대 자료를 연구해 만든 어막차.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집공방이 의궤 같은 조선시대 자료를 연구해 만든 어막차.

 
한옥 앞 한켠에는 1인용 해가리개도 있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참고해 온지음이 만들었다. 지지대와 받침목, 멍석과 무명천을 결합해 휴대용 그늘막의 기능을 갖췄다.
 
전시장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강예린·이재원·이치훈으로 이뤄진 건축가 그룹 SoA의 작품,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최춘웅의 작품도 자연스레 만난다. 각각 현대적 특징이 뚜렷한 재료와 구조임에도 햇볕을 일방적으로 차단하는 대신 공간에 대한 새로운 경험, 안팎의 소통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점이 두드러진다.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름지기는 매년 의·식·주를 번갈아 주제로 삼아 전통문화를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기획전을 열어왔다. 이번에는 ‘주’에 해당하는데 야외와 실내를 엄밀히 구분짓는 대신 그 경계를 즐기곤 했던 전통 건축의 묘미를 해가림이라는 새로운 초점으로 포착한 점이 돋보인다.
 
전시장과 작품 자체가 휴식 기능을 갖춘 특징을 살려 모든 관람객에게 커피나 차 한 잔을 무료로 제공한다. 한복을 입었거나 볕 뜨거운 정오~오후 2시 사이에 입장하면 관람료도 무료다. 11월 10일까지. 관람료 5000원. 월요일 휴관.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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