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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중고생 라틴어 열풍, 스킬보다 생각 키우는 계기 삼아야”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상한 언어인 동시에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로 꼽힌다. 동사 하나의 능동태 어미 변화만 해도 60가지가 넘고, 수동태의 어미 변화는 더욱 복잡하다. 더욱이 한국인에겐 열심히 익혀 놓아도 딱히 실생활에 써먹을 데가 없는 언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의 선전은 놀랍다. 지난 6월 출간돼 2달 사이에 5만 부가 넘게 팔린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 『라틴어 수업』이다.

베스트셀러 『라틴어 수업』 저자 한동일 신부

 
책을 쓴 한동일(47)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 변호사라는, 역시 독해가 쉽지 않은 이력을 지녔다. 한국 광주·부산 가톨릭대에서 공부하고 이탈리아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교회법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라틴어 수업』은 그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서강대에서 강의했던 ‘초급·중급 라틴어’ 수업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첫 학기 24명으로 출발했던 이 수업은 학생들 사이에 명강의로 소문나면서 2년 째부터는 매 학기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여드는 인기 강좌가 됐다. 무엇이 이들을 라틴어의 세계로 이끌었을까. 저자 한동일 신부를 지난 4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라틴어 수업』이란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이 책은 뭐지?’ 했다.
“나도 상상 못 한 반응이다. 그동안 책을 여러 권 썼지만 1000권 이상 팔린 책이 드물다. 라틴어라는 낯선 주제에, 유명하지 않은 저자의 책을 이렇게 많이 읽어줄 줄이야. 신기한 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누군가를 위로하겠다는 생각으로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쓴 게 아닌데, 독자들은 ‘위안 받았다’ ‘용기를 얻었다’고 하더라. 외국에서 비슷한 강의를 하면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그에 비해 한국 사람들은 많이 아프고 피로하구나, 그걸 달래줄 이야기를 찾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라틴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실제 수업은 1시간 15분 중 1시간은 라틴어에 집중했다. 교양 수업이라 문법을 완벽하게 가르치기보단 라틴어를 매개로 유럽의 학문적 깊이와 문화의 다채로움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수업 마지막에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어 ‘장점과 단점(defectus et meritum)’이라는 단어를 가르친 시간에는 나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털어놓고 학생들에게도 생각할 기회를 줬다. 책은 문법이나 단어 자체에 대한 설명을 많이 줄이고, 주변 이야기들을 살렸다.”
 
‘바티칸 대법원(로타 로마나) 변호사’라니 무슨 일을 하는 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가톨릭의 뿌리가 깊은 유럽에선 낯설지 않은 단어다. 쉽게 말하면 근대 국가가 생기기 전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했던 교회 법원이 그 기능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교 분리 과정에서 여러 국가들이 교회 법원과 국가 사법부 판결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조약을 맺었는데, 여러 나라에서 교회의 판결이 국가의 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예를 들어 독일의 어떤 병원에서 노동 쟁의가 있었을 때, 병원측이나 노동자측이 사법부의 판결에 불복해 로타 로마나에 소를 제기할 수 있다.”
 
바쁠 것 같은데 한국에서 강의를 해도 되는 건가. 
“1년에 1만3000여 건이 접수되니 바쁘긴 하다. 매해 초 교황님 앞에서 변호사들이 시무식을 하고, 그 이후엔 자신이 맡은 일을 처리하면 건별로 보수를 받는다. 강의는 2010년 이탈리아에서 잠시 귀국했을 때 우연히 시작했는데, 가르치는 일이 즐거워 계속 하게 됐다. 방학에는 주로 바티칸에 머문다.”
 
서울 제기동에서 나고 자란 그가 성직자이자 바티칸의 법률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신의 뜻’ 혹은 ‘운명’이란 표현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도시 빈민 가정의 늦둥이였던 소년은 걱정과 배고픔과 다툼과 빚쟁이들의 고함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난처로 ‘책’을 택했다. 18살, 16살 위였던 형들의 책장에 있던 몽테뉴의 『수상록』, 스탕달의『적과 흑』같은 책을 사전을 펴 놓고 파고들었다. 신앙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 천주교 학교였던 동성고에서 만난 곽성민 신부님은 마음이 뾰족했던 소년에게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을 보여줬다. 학비가 없는 대학을 다녔고, 유학을 간 후엔 유일한 동양인 학생으로 이탈리아어와 라틴어의 바다에서 분투한 끝에 최우등상 ‘Summa cum laude(숨마 쿰 라우데)’를 받으며 졸업했다. 그는 “육성회비도 내지 못해 학교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했던 내가 평생 공부를 하고 있으니, 종교인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팔자’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며 웃었다.
 
놀라운 삶이다. 
“힘든 상황에선 아이들의 마음이 웃자란다. 나만 해도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였다. 부모님이 경제력이 없으니 내 길은 내가 헤쳐가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생각해보면 언어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것 같다. 『성문종합영어』같은 문법책에 나오는 문학 작품이나 케네디 연설문 등을 읽으면 다른 세계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라틴어도 재밌었나.
“신학대 1학년 때부터 라틴어를 배웠는데, 친구들은 어렵다고 우는데 난 그렇게 재밌는 거다. 라틴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 말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이 책에 적힌 학습법은 19살 때부터 내가 혼자 공부하며 익힌 것이다.” 
 
언어에 특별한 매력이 있었나.  
“라틴어는 너무 복잡해 처음에 좌절하기 쉽다. 하지만 고비를 넘기고 까다로운 문법 체계를 익히고 나면 자연스럽게 다른 공부의 방법도 깨우치게 된다.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는 ‘습관’이라는 뜻도 있지만, ‘수도승들의 옷’을 의미하기도 한다. 수도승의 기분으로 꾸준히 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 게 라틴어다. 이런 머리와 마음의 습관이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의 문제를 풀어내는 생각의 틀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강남에서 라틴어 열풍이 불고 있다는 데. 
“미국의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중·고등학생들이 라틴어를 배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스킬만 열심히 배우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학생들에게 교수들이 원하는 건 ‘스킬’이 아니라 ‘생각’이다. 스킬 안에 담을 콘텐트가 없으면 언어를 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지금 우리 사회가 힘든 것은 스킬만 엄청 익힌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자기 주머니 불리는 일에만 쓰기 때문이다. 이러면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다.” 
 
요즘도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한다고 들었다. 
“공부하는 사람이 끝까지 가져야 할 자세가 학문 앞에서의 겸손함이다. 『라틴어 수업』이 열매 같은 책이라면, 내가 계속 해 왔고, 하고 있는 공부는 뿌리를 다지는 과정이다. 올해 1월에 나온 『교회법률용어사전』은 완성하는 데 12년 걸렸다. 사전을 번역하던 중 한국의 이탈리아어 사전에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이탈리아어 책을 쓰고, 중세 유럽법이 까다로워 그걸 정리하는 『유럽법의 기원』도 냈다. 지금은 이 책의 개정증보판 작업을 하고 있다. 유럽에 뒤지지 않는 라틴어 학습서와 라틴어 사전 작업도 해보고 싶다.”
 
라틴어 수업은 다시 안 하나. 
“언제라도 하고 싶다. 이 강의를, 이 책을 만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학생들이다. 중간고사 주제는 늘 ‘데 메아 비타(De mea vita)’였다. ‘내 인생에 대해’ 라는 뜻인데 자신의 삶을 A4 한 페이지로 적어내야 하는 숙제였다. 학생들이 쓴 글을 보며 아이들이 정말 열심히 살고 있고, 대학이라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고 싶은 욕구가 강하구나 느꼈다. 하지만 정작 대학들은 취업에만 신경 쓰고 학생들의 진짜 열망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학생들과 만나면서 내 안에 남은 상처와 아픔을 되돌아보고 치유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수업에선 이 경구를 들려줬다.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Dum vita est, spes est·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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