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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륜의 역사가 일깨운 폐지의 가치

공감 共感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1년 계획은 봄에 있고, 하루 계획은 아침에 있다(一年之劃在於春, 一日之劃在於晨).”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때 1년간의 계획을 먼저 세운 다음 실행에 옮기라는 뜻이다. 나 또한 연초마다 큰 결심을 하고 난 후에야 일을 시작하고자 한다. 전형적으로 이 명언을 따르는 사람인 셈이다. 하지만 일이라는 게 항상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봄에는 야심차게 새 뜻을 품고 날아오르기를 기원하지만 가을이 되면 열정 또한 시들고 소실되기 마련이다. 시인들이 종종 가을을 잎이 떨어지고 비탄에 잠기는 계절로 비유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일는지도 모른다.
 
『중화상하오천년』의 정수를 담은 공책.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

『중화상하오천년』의 정수를 담은 공책.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

운명은 정말 변할 수 없는 걸까. 사실 나는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는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나는 지난 여름 시안(西安)에 갔을 때 작은 노트 한권을 샀다. 표지에는 ‘나의 독서 계획’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2018년에는 매일 내가 읽은 책의 문장이나 시구, 혹은 역사서의 내용을 기록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던 터라 내게 꼭 맞는 노트였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부터 큰 기대감에 부풀었다.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는 충만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그러다 보니 ‘왜 꼭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가을에 시작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나는 더는 핑곗거리를 찾는 것을 멈추고 당장 펜을 들고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자, 오늘 읽은 것부터 적어보는 거야. 책상 위에는 역사서 3권이 놓여져 있었다. 『중화상하오천년(中華上下五千年)』. 아주 두껍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손으로 쥐어 보면 꽤 분량이 있는 편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책들은 올해 초에 샀던 것 같다. 그 때도 나는 ‘암, 일년 계획은 자고로 봄에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지난 여덟 달 동안 첫 번째 편을 간신히 다 읽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석 달, 혹은 3주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막 읽은 부분은 서기 105년 채륜(蔡倫)의 종이 발명이었다. 이는 나침반·화약·인쇄술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품이기도 하다.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까지는 황실과 조정에서 대나무로 만든 죽간에다 글자를 썼다고 한다. 민간에서 백성들이 물건을 쌀 때 쓰는 종이는 너무 거칠어서 글자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채륜은 낡고 오래된 삼베옷과 신발, 나무껍질과 그물 등을 모아 석회를 넣어 풀을 먹여 얇고 매끄러운 종이를 만들었다. 덕분에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종이는 아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펜을 들고 종이에 직접 글자를 쓰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어제 백화점에서 샀던 접시가 떠올랐다. 판매원이 접시가 깨지지 않도록 합성수지로 만든 에어캡 대신 종이 몇 겹을 덧대 포장하는 모습을 보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평소 환경보호 의식이 투철한 나는 회의 시간에 몇 번이나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백화점을 비롯한 각 부문별 동의를 얻어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뿌듯하지 않겠는가.
 
남다른 환경보호 의식은 회사에서만 아니라 집에서도 종종 발현된다. 집안에 켜져 있는 불은 족족 끄고 다니고, 에어컨도 꺼 버리고, 종이마저 뒤집어서 한 번 더 쓰라고 잔소리를 해 대는 통에 아이들은 내게 ‘환경보호 괴물’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 역시 이제 습관이 돼서 나를 원망하기는커녕 내 모습을 닮아가는 걸 보니 나의 ‘환경보호 세상’에 들어선 게 분명하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종이나 공책 등 문구류를 각별히 좋아했다. 특히 촉감이 좋고 예쁘기까지 하면 쓰는 게 아까워서 모셔 둘 정도였다. 평소 서예 연습을 할 때 또한 재생지를 주로 쓰는 편이다. 화장대 옆에 놓아둔 폐지 상자를 보고 아이들이 “상자에 돈이 쌓이는 것보다 폐지가 쌓이는 걸 더 기뻐하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니 오죽할까.
 
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방해공작에도 개의치 않는다. 가장 책임감 있는 괴물이 되기 위해 어제 접시를 싸고 있던 종이를 꺼내 들어 서예 연습을 했다. 채륜이 살던 때와는 달리 꽤 쓸 만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도전해 보길 권한다.
 
 
천추샤(陳秋霞·진추하)
라이언팍슨 파운데이션 주석
onesummernight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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